login  join 
Category
[견습기사]  斷崖 -下- [3] 2010.11.02-20:08:07
  list
6.

조운과 부장 한 명이 각자의 별동대를 이끌고 진을 나가자마자 등지는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후위에 보초를 늘리라고요? 아까는 배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잖습니까?”
“전장에서 보초를 늘리는 게 뭐가 문제요?”

표정으로 드러내진 않았지만 내심 아차 싶었다. 말을 가리라고 조운에게 주의를 들은 지 한시진도 지나지 않았다.

“이제부터는 조장군과 연락을 유지하는 게 중요하오. 전령 한둘쯤은 10만 대군이 올 것도 없이 장정 한 명이면 때려죽일 수 있소. 그러니 지금 배후를 경계하는 건 적습대비보다는 연락선을 지키자는 거요. 본진의 경계라는 면에서도 나쁘지 않고.”

부장들은 비로소 수긍했다. 더해서 등지는 한 번에 파견하는 순찰인원은 줄이되 순찰조의 수와 범위는 늘리도록 지시했다. 별동대는 공사를 하다 내버려둔 곳들을 중심으로 바쁘게 이동하며 기곡에 스며든 위군측 척후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길 것이다. 그런 별동대가 몇 개 더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주고 싶었다. 조운이 어디에 있는지 헷갈리게 만든다면 더욱 좋다. 조진이 힘으로 밀어붙일 때를 대비해 몇 가지 전술을 상정하는 회의가 이어졌다.
조운이 쓰던 막사에서 책상 앞에 정좌한 채 꾸벅거리던 등지는 갑주 속으로 스며드는 새벽의 냉기에 번쩍 정신을 차렸다. 등잔은 꺼져있었다. 깎아지른 벼랑과 봉우리로 둘러싸인 계곡에서는 아침이 늦게 찾아온다. 아직은 어둑하지만 이미 아침밥을 지을 무렵이라고 생각하는 게 좋을 것이다. 온기가 돌지 않는 몸을 오들오들 떨며 밤새 들여다본 지도와 죽간 무더기를 정리하려는데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간밤에 후방으로 보낸 초병의 조장이었다. 보고를 듣는 자리에는 가장 노련하다며 조운이 추천해준 부장 한 명만 불렀다.

“북쪽으로 30리쯤 될 곳에서 불빛을 하나 봤습니다. 처음엔 잘못 봤나 했는데 틀림없습니다. 봉우리 사이에서 3각 쯤 가물거리다 사라졌거든요.”

그 위치는 두 별동대의 행선지가 아니다. 후방의 촉군이 이동한다는 말을 들은 적도 없다. 아무리 캄캄한 어둠 속이었다지만 30리 밖에서 보일 정도라면 그만큼 불빛이 강했다는 이야기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어디로 향했나?”
“그걸 모르겠습니다. 워낙 멀고 가리는 게 많아서.”

그쪽 방면의 지도를 찾아냈다. 위군 만큼 세세하진 않지만 촉군에도 대략적인 지도가 있었다. 조장의 증언과 부장의 의견을 들어보며 지도를 더듬어간 등지는 불빛이 보인 지점이 북쪽에서부터 토막토막 끊기며 기곡의 골짜기로 이어지는 가파른 능선의 어딘가라는 것까지 확인했다. 능선의 북쪽 끝은 가정의 서쪽을 지났다.
가정.

“불을 봤다는 걸 소문내지 마라. 여기서 들은 것도 모두 잊어. 당신은 부장들을 전부 소집해주시오. 아니, 먼저 기병 2천을 보내 보급로를 확인해주시오.”

보급로는 곧 퇴각로이기도 하다. 소집된 부장들이 질문했다.

“무슨 일입니까? 보급로에 문제가 생겼습니까?”
“아직은 아니오. 그렇지만 본진을 이동해야 할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소.”
“3만 가까이 되는 아군의 병력이 진을 칠 수 있는 곳은 이 근방 밖에 없습니다. 이 지점을 버리면 조진이 편하게 우릴 공격하라고 길을 내주는 꼴인데요.”
“게다가 등장군은 보급로를 걱정하고 있잖습니까. 대체 무슨 일입니까?”
“일단 그걸 알아봅시다.”

전령이 달려왔다. 조진군이 다시 기곡도로 진격해오고 있다 한다. 그 수는 5만. 들이닥치는 시간대가 너무 좋았다. 확신을 얻은 등지는 입을 꾹 다물어 신음을 삼켰다.

“빠른 말을 보내 조장군에게 알려라. 상황이 급박하다. 당장 귀환하셔야 한다. 다른 별동대도 마찬가지다. 기병은 출발했겠지? 여러분은 방비만 하고 싸움에 절대 응하지 마시오.”
“어젯밤 회의에서 응전할 계획을 끝냈습니다. 그대로 배치를 마쳤는데 바꿔야 합니까?”
“아니, 배치는 그대로. 진 밖에 나가는 작전은 빼야겠소. 조장군이 오시면 설명하겠소. 그때까지 부탁합시다.”

부장들은 그 이상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잠깐 동안 그들이 겪어본 등지는 보통의 문관들처럼 언사만 화려한 사람이 아니었다. 게다가 조운이 그를 신뢰했다. 수립한 작전을 모두 포기하고 조운을 불러들여서 설명해야 할 상황이란 게 보통의 일이 아닐 것은 분명했지만 지금은 억측이나 할 때가 아니었다.
조진군은 어제와 달리 기세가 있었다. 지형이 불리해 본진까지 쉽사리 접근하진 못했지만 공세는 대단히 사나웠다. 어제는 없었던 쇠뇌까지 동원되었다. 눈앞에서 목책 안쪽에 설치된 기둥 하나가 빗나간 쇠뇌에 박살나는 것을 본 등지는 보름은 자신 있다고 말한 자신을 때려주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의 이성을 붙잡은 것은 장졸들의 침착한 태도였다. 벼랑 아래로 화살과 돌을 퍼붓고 무너진 부분을 재빨리 수습하며 뛰어다니는 모습들은 오기 같은 것을 일으켰다. 실제로 촉군은 그리 불리하지 않았다. 전선이 아주 협소하기에 병력을 나눠 교대로 투입할 수도 있었다. 게다가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향하는 위군의 공격은 사나움에 비해 그리 효과적이지 못했다. 어느 새 등지는 화살이 몇 대 박힌 망루에서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정오 무렵 계곡을 내려다보는 벼랑 위에 6천명의 촉군이 나타났다. 급히 식사를 끝낸 교체병력이 나서면서 촉군은 엄중한 기세를 회복했다. 위군은 공략이 생각대로 되지 않아 기세가 전만 못한 상황이었다. 조운은 벼랑 위를 따라 달리며 화살을 퍼붓게 했다. 조(趙)의 깃발을 펄럭이며 머리 위에서 벼락 치듯 가해진 공격에 위군은 혼비백산했다. 별동대가 곧장 본진 쪽으로 달려가 버렸기에 공격은 짧았지만 위군은 상당히 사기가 꺾여버렸다. 조진은 선발을 물리고 뒤에서 대기 중이던 신선한 병력을 투입했다. 위군의 병력이 교체되느라 공격이 멈춘 짧은 시간 동안 조운은 정문으로 본진에 들어갔다. 등지와 부장들이 달려왔다.

“설명해라.”

조운은 차분했다. 등지가 작전을 모두 포기해가며 그를 불러낼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믿는 모습이었다. 등지는 군졸들의 이목을 피해 망루에 가까운 막사로 이끌었다.

“간밤에 보낸 척후가 ‘적군’을 발견했습니다. 위치는 북쪽으로 30리. 야음을 틈타 이동 중이었습니다.”

등지가 땅바닥에 손가락으로 그린 지도를 보고 조운과 부장들의 안색이 점차 굳어졌다.

“적군이라고. 틀림없이 위군인가?”
“확신합니다.”
“어째서지? 배는 쓸 수 없다. 대군이 지날 수 있는 길목은 모두 우리가 장악했다. 그런데 어떻게 배후에 적이 나타난다는 이야기인가.”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도 되겠습니까?”
“해.”
“가정의 마속군이 무너진 겁니다. 그쪽으로 간 적장은 장합이었지요? 장합이 기산으로 가는 김에 한 갈래의 군을 우리의 배후로 보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조운이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제갈량의 웃는 얼굴이었다. 출사의 표문을 마친 그날 두 사람은 밤을 새워 술을 마셨다. 옛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저 끝없이 잡담을 했다. 마속에 대한 이야기도 했다. 제갈량은 마속이 남만에서 보여준 유능함을 칭찬했다. 그 젊은이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노라고 말하기도 했다. 벌써 후계자 같은 것을 생각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문득 그의 머리털에 섞여들기 시작한 흰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그에게도 겁 없는 애송이 같은 시절이 있었는데.

“거긴 길목을 지키기만 하면 돼. 그렇게 쉽게 뚫릴 리도 없고. 자네 정말로 확신하나?”
“그 밖에는 이 상황을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조진군이 들이닥친 시간대가 너무 좋습니다. 그게 적 별동대라면 오늘 오후 중으로 도착할 겁니다. 오후쯤이면 우린 하루 종일 전투를 해 잔뜩 지쳐 있겠죠,”
“단정할 순 없어.”

조운은 지도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등지와 부장들은 숨 쉬는 것조차 버거운 무서운 위압감을 느꼈다. 순간 급한 말발굽 소리가 다가왔다. 누군가가 뛰어 들어왔다. 등지가 아침에 보낸 기병이었다. 기병은 부상당한 군졸을 부축하고 있었다.

“등장군의 명령으로 보급로를 확인하다 만났습니다. 기산에서 온 아군의 전령입니다.”

힘겹게 고개를 든 부상병은 조운을 발견하자 비통한 목소리로 외쳤다.

“조장군님! 급보입니다! 가, 가정이 무너졌습니다.”

누군가가 짓눌린 신음 소리를 냈다. 가정을 깨트린 장합의 대군이 천수를 쳤다.
3군의 백성들이 위를 배반했지만 그것뿐이다. 백성들은 무력하다. 위군이 나타나면 3군은 힘없이 위에 복속될 수밖에 없다. 가정과 기곡과 기산은 모두 위의 땅이었다. 적지에 나온 촉군이 백성이라는 배후까지 잃는 순간 퇴로는 끊긴다. 그때는 전멸이다. 조운은 눈을 감아 아찔해진 기색을 감췄다.

“승상은? 본대는 무사한가?”
“본대는 아직 무사합니다.”
“그럼 됐어. 명령은?”
“남정에서 재집결입니다.”

날카로운 발톱이 가슴속을 쥐어뜯는 것 같았다. 조운은 눈을 떴다. 부장들의 얼굴이 보였다. 경악, 침통, 체념, 분노, 극단적인 얼굴들이 하나같이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진을 버린다.”

부장들 중 가장 젊은 자가 팔뚝의 보호대를 물어뜯어 울음을 삼켰다. 조운의 나직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기병으로 진 앞에 달라붙은 녀석들을 쫓아내겠다. 그동안 목책의 수비 병력은 졸오별로 천천히 이탈한다. 나머지는 반 시진 내로 진을 정리하도록. 속도가 생명이다.”

북벌은 실패했다. 패주다. 그러나 대장이 그런 단어를 입에 올릴 수는 없었다.

“두고 가는 것이 없어야 한다. 역적에게는 보리 한 톨도 넘겨주지 마라. 등지.”
“예.”
“양평관 앞까지 이동해 아군의 퇴로를 확보한다. 위연이 연계를 구하면 협조해라. 나는 뒤를 끊겠다. 장졸들을 무사히 이끌어주게.”
“뒤를 끊는 건 제가 하겠습니다. 진을 지키는 게 제가 할 일입니다.”
“풋내기는 시키는 대로 해. 나를 기다리지 말고 최대한 빨리 이동해라. 나보다 먼저 도착하면 그 자리에서 진을 치고 대기한다.”

나이 오십에 풋내기 소리를 들으면 발끈할 법도 한데 등지는 아무 말이 없었다. 군사는 군사였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부장들도 격정을 억누르지 못하는 상황에서 냉정하게 생각을 거듭하고 있었다. 장합군은 배반한 3군을 먼저 평정해야 하니 후퇴하는 촉군을 맹추격하진 않을 것이다. 별동대도 소수이리라. 그러나 조진군의 위치는 남정에 가깝다. 진을 치고 대기하라는 것은 혹시라도 조진이 기산과 가정에서 후퇴하는 아군을 치거나 직접 남정으로 넘어오지 못하도록 견제하라는 의미였다. 조운은 등지의 진을 방어한계선으로 삼고 최후미에서 날뛸 작정이었다. 조운군은 남정에 가장 가깝지만 가장 늦게 도착할 것이다. 등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리하진 말아주십시오.”

조운은 물러가라는 손짓으로 대답했다. 등지가 앞장서자 부장들은 급히 예를 갖추고 진을 정리하러 달려갔다. 텅 빈 막사 안에서 조운은 한동안 팔짱을 낀 채 눈을 감고 움직이지 않았다.




7.

들어올 때는 가까웠던 길이 나갈 때는 한없이 멀게 느껴졌다.
조운은 혹은 싸우고 혹은 살피며 천천히 물러났다. 시야가 트인 곳은 피하고 궁병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곳에서는 느닷없이 쳐들어갔다. 명성이란 좋은 것이었다. 장판파와 한중의 이야기를 아는 위군 군졸들은 수염이 희끗한 노장에게 함부로 달려들지 못했다. 자신의 힘을 믿고 덤볐다가 창에 꿰인 젊은 군졸들이 없진 않았다. 그것이 전설에 공포스러운 실체를 부여했다.
그래도 조진군은 꾸준하게 조운을 압박했다. 길이 외통수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서쪽과 남쪽으로 갈림길이 나뉘는 적애 근처까지는 지루한 압박과 견제가 계속될 터였다.
한번은 조진이 직접 앞으로 나온 적이 있었다. 조조의 아들 조비와 함께 자랐다고 들었다. 한중전에 참가한 경험 있는 장수지만 그 싸움에서 주를 맡았던 위군의 옛 맹장들과 비교하면 어린 세대였다. 조진은 공격을 염려하지 않아도 좋을 위치에 올라갔다. 무구가 깨끗하고 근사했다. 일군의 총대장이라면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듯이. 며칠째 말라붙은 피를 씻지 못한 조운은 조진의 태도가 정도라는 것은 인정했다. 눈이 마주쳤다. 조진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구시대적인 늙은이다.

너를 키워준 조조도 직접 갑주에 피를 묻히며 싸웠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었다. 도로 삼켰다. 웃음이 나올 뿐이었다. 말이 뒷발로 곧추섰다. 앞발이 땅을 딛는 순간 조진을 향해 곧장 돌격했다. 위군의 장졸들이 당황하며 필사적으로 막아섰다. 조진은 움찔했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그저 위협이라는 것을 아는 듯했다. 아슬아슬하게 활이 닿지 않을 거리에서 멈춘 조운은 씩 웃으며 핏방울이 떨어지는 창을 겨눴다.

우리를 쫓아오지 마라. 3군으로 가라.

3군의 백성들은 배반한 대가로 엄청난 고역을 치를 것이다. 촉이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없다. 그것은 다음 북벌 때 민심에 영향을 줄 것이다. 그렇지만 조운은 그들을 방패삼아 도망쳐야 했다. 군졸들을 더 이상 잃을 수 없었다.
조진은 곧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 다음은 지루한 압박과 견제의 반복이었다. 조진은 이미 장합이 들어갔을 3군에 뒤늦게 들어가는 것과 도주하는 촉군을 착실하게 짓밟는 것의 이득을 대중하고 있는 듯했다. 더군다나 그 패주군에는 적의 제일가는 장수가 있었다. 촉군을 추격할 거라면 조진의 목표는 조운을 죽이는 것으로 변경될 것이다. 조운은 그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 때문에 위군이 지체하기라도 한다면 퇴각 중인 촉군에게는 시간이 생긴다. 자신은 어쨌든 살아남으면 이기는 것이다.
손에 든 창이 무거웠다. 자신은 피곤하게 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만 지나면 우리 땅이다! 다들 정신 차려라!”

교위 한 명이 내지른 소리가 현실로 주의를 끌어냈다. 내리막으로 이어지던 산길이 급격한 비탈이 되어 무너지고 그 위로 산의 옆구리에 박힌 가시 같은 잔도가 일어섰다. 멀지 않은 곳에서 물소리가 들렸다. 조운은 이 길을 기억해냈다. 적애였다. 급류가 휘감는 절벽을 따라 잔도가 100여리나 이어진다. 위군의 추격을 막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이 잔도를 끊어버리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조운은 주저했다. 기곡은 한중에서 북진하기에 가장 좋은 경로 중 하나였다. 잔도가 끊기면 위군이 남하할 수 없지만 촉군도 북진할 수 없다. 다음 북벌을 위해서라도 할 수만 있다면 제갈량의 선택지를 줄이고 싶지 않았다. 미처 결심을 내리기도 전에 군졸들이 잔도를 건너기 시작했다.
잔도에서 떨어진 돌 부스러기가 물수제비를 뜨는 것처럼 절벽 위로 통통 튀었다. 떨어진 것은 모두 급류의 흰 거품 속으로 사라졌다. 바람이 거셌다. 군졸들은 절벽을 끌어안다시피 매달려 게걸음으로 걸었다. 말들은 끊임없이 머리를 흔들어 고삐를 끌어당기는 군졸들의 진을 빼놓았다. 먼저 간 본대는 군량을 비롯해 온갖 보급품을 실은 수레를 끌었다. 3만이 써야 하니 그 수가 적지 않았다. 여기서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 아직 잔도 위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적 또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잔도에 기름을 뿌려라.”

바람에 날리거나 헛딛지 않도록 서로 붙들면서 군졸들이 기름을 뿌렸다. 그렇게 1리쯤 나아가자 조운은 바닥을 부수도록 명했다. 기름이 고역스런 내를 풍기는 저편과 사람들이 더듬거리며 걸어가는 이편의 사이에 두 길 정도의 공백이 생겼다.
조운은 현기증이 나는 높이의 절벽을 내려다보았다. 지층이 드러난 단애였다. 칼로 잘라낸 것 같은 단면은 억겁의 세월동안 차곡차곡 쌓아온 것을 고스란히 내보였다. 어찌 보면 땅의 주름살 같기도 했다. 그것을 들여다보면 이 땅이 살아온 역사를 읽어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것뿐이었다.
잔도가 시작되는 저편에서 일단의 군졸들이 머뭇거렸다. 이쪽의 동정을 읽으러 온 척후였다. 억겁의 세월은 바람이나 희롱하라지. 조운은 직접 활을 든 채 잔도 위에 버티고 섰다. 피식 웃음이 흘렀다. 장비가 생각났다. 20년 전 장판파의 다리를 가로막았던 전설적인 위용이 아니라 바보 같은 실수를 저지르고 빨개진 채 괜한 억지를 쓰는 모습이었다.

“조진에게 전해라! 이 길은 상산 조자룡이 지키고 있다! 목숨이 아깝지 않다면 와도 좋다!”

불을 당긴 화살이 날아갔다. 화염이 바람을 타고 잔도를 집어삼켰다.
다리 위에 버티고 선 장비에게는 20기 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그 20기로 유비와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해 조조의 5천 기병을 상대하면서 장비가 무슨 생각을 했을지 궁금해 했다. 수 년 후 한중에서 불과 수십 기로 조조의 본대를 헤집은 조운은 같은 질문을 받자 그때의 장비처럼 어깨를 으쓱이고 말았다. 그들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 무렵에도 이미 나이가 적지 않은 그들이었지만 싸움에 임하면 언제나 새파란 젊은이가 되었다. 싸움에서 져도 다음에는 이길 것을 믿고 한바탕 웃어버릴 수 있었다. 그 감각은 난세의 한복판에서 싸우고 살아남은 경험을 공유하지 않으면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세상은 아직 난세였다. 그러나 젊었던 그들은 이제 없다. 싸움의 방식도 달라졌다. 패배를 받아들이는 감정조차 달라졌다. 조운은 뱃속 깊숙한 곳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열을 참을 수 없었다. 장비가 보고 싶었다. 먼저 간 이들이 너무도 보고 싶었다. 뜨겁다. 뜨겁다.
터져 나온 노호는 웃음 같기도 하고 울음 같기도 했다.




8.

꿈을 꾸었다.
꿈이라는 것을 안 것은 있을 리 없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젊을 적 모습 그대로였다. 적이었던 사람도 있고 모르는 사람도 있었다. 사람들은 오솔길 같은 곳을 걸어가며 웃고 떠들었다. 선두에 그 세 사람이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유비는 영안에서 마지막으로 본 모습이었다. 그러나 관우와 장비는 처음 만났을 때의 모습이었다. 수염이 듬성듬성한 장비라니. 어이가 없어서 웃고 말았다. 그들을 부르려고 손을 들다가 멈칫했다. 주름지고 검버섯이 돋은 손이 보였다.
장비의 뒤에서 누군가가 고개를 돌렸다. 수염도 나지 않은 새파란 애송이였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째선지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9.

“왜 내가 누워있는 건가.”
“여기가 어딘지는 아시겠습니까?”
“몰라. 자네가 내 명령을 지켰다면 양평관 근처일 텐데.”
“진에 도착하자마자 쓰러지셨습니다. 하루가 지났고요.”
“쓰러져? 내가?”
“뒤를 끊기 위해 며칠이고 주무시지도 않고 싸우셨다 들었습니다. 무리하신 겁니다.”

조운은 한숨을 쉬었다. 일어나 앉으려 하자 등지가 등을 받쳐주었다. 갑주를 벗겨낸 몸이 허하게 느껴졌다.

“상황은?”
“아군은 모두 무사히 남정에 도착했습니다. 양평관에 남은 우리가 마지막입니다. 위군은 3군을 평정하는 데만 집중하고 있습니다.”
“나만 누워있진 않겠군. 나를 따라온 군졸들은 어떤가.”
“잘 쉬고 있습니다. 100리나 되는 잔도 하나를 태워버리셨다면서요.”

책망은 아니다. 단지 사실의 확인이었다. 조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소리 들을지도 모르겠어.”
“무슨 말씀을. 하셔야 할 일을 한 겁니다. 아. 주무시는 동안 위연 장군이 다녀갔습니다.”

위연이 무슨 이야기를 하러 왔을지는 짐작이 되었다. 위연은 조운과 잘 지냈다. 가끔은 위연 쪽에서 불평불만을 털어놓으러 오기도 했다. 그러면 조운이 승상에게 잘 전해줄 거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런 것들이 제갈량으로 하여금 그를 신뢰하지 못하게 만드는 이유 중 하나였다. 그러니까 직접 만나 둘이서 담판을 지으란 말이야. 조운은 지끈 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미열이 느껴졌다.

“더 볼일이 없다면 우리도 퇴각하지.”
“좀 더 쉬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여기엔 위장군도 있습니다. 하루 정도는 더 기다려줄 겁니다.”
“그만큼 군량이 축난단 말이다.”

과연 이 말에는 등지도 반박하지 못했다. 참 고지식한 사람이었다. 조운은 일어서려 했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고꾸라지려는 것을 등지가 붙잡았다. 식은땀이 돋았다. 체력의 회복이 늦었다. 도통 피곤한 걸 모르던 예전과는 다르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침상에 앉은 조운은 고개를 숙이고 엄지와 검지로 양편의 관자놀이를 눌렀다. 자연스레 눈이 가려졌다.

“나는 늙었네. 깨닫는 게 좀 늦었지.”
“손 한 번 헛짚은 걸로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군졸 중에는 조장군이 늙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직도 그만큼 정정하십니다.”

조운은 대꾸하지 않았다. 설명하기 귀찮았다. 부축을 받아 일어섰다. 이번에는 제대로 땅을 디뎠다. 언제나 일을 벌이는 것보다 뒤를 수습하는 쪽이 일거리가 많다. 대장이 누워있을 수는 없었다.
양평관에서 남정은 본래대로라면 한달음이면 갈 수 있는 거리였다. 눈이 내려있었다. 산봉우리 사이에 갇힌 습기가 쉬 증발되지 않아 안개가 자욱했다. 행군이 지체되었다.
강유라는 젊은이의 이름이 종종 들려왔다. 천수에서 귀순한 위군 교위라고 한다. 귀순한 위국인이 적지 않을 텐데 유독 그의 이름이 들리는 것이 범상치 않았다. 마속의 이름은 그보다 더 자주 들렸다. 조운이 보는 앞에서 젊은 군졸이 행군 중에 주저앉아 울었다. 한 달. 겨우 한 달 만에 북벌이 실패한 것을 군졸들은 믿지 못했다.

“모두가 마속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승상께서 마속을 죽여야 한다는 말이 자꾸 들립니다.”
“군령을 어겨 전군을 패배에 몰아넣었다. 당연한 거다.”
“이런 상황에서도 남부터 걱정하시는군요.”
“누구를?”

등지와 자주 대화했다. 옛 사람들이나 제갈량과는 구구절절 설명할 것 없이 한두 마디로 이야기가 통하곤 했다. 젊은이들은 그렇지 못했다. 젊은 축이 아닌 덕인지 등지는 그나마 나았다.

“이제는 자신부터 걱정하시죠. 저에게 투덜거리셔도 좋습니다. 어디 가서 떠들진 않을 겁니다. 모시는 대장이 어린 아가씨처럼 투덜거린다고 소문내서 좋을 게 뭐 있겠습니까.”

마치 선심을 쓴다는 듯한 태도라니. 제 딴에는 위로하는 것이리라. 이런 것까지 옛 사람들을 연상시킨다. 하긴 연배로는 조운보다 조금 어린 정도에 불과했다. 조운은 코웃음 쳤다.

“이봐, 참견꾼. 내 위치 쯤 되면 불평도 아무한테나 하는 게 아니야. 나는 승상에게만 불평해.”
“요즘엔 안 하신다면서요.”
“지금 하러 가고 있지 않나.”
“사실은 승상의 넋두리만 들어드리고 나오시려는 거 아닙니까?”
“그게 그거지.”

등지는 낯을 찡그렸다. 미간의 내천 자가 도드라졌다. 모처럼의 호의가 거절당해서인지 부대 바깥의 사람하고만 흉금을 트는 게 불만스러운 것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이상한 데서 군대의 방식에 빠르게 적응해버렸다. 게다가 좋고 싫고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장수로서는 결점이다. 조운은 언젠가 제대로 잔소리를 해줘야겠다고 생각하며 투구를 벗고 눈 주위를 문질렀다. 피로가 가시지 않은 탓인가, 양평관에서 시작된 열은 아직도 남아있었다.

“자네 이야기나 들어보세. 고향은 어딘가. 억양이 본래 익주 사람은 아닌 듯한데.”
“본래 형주 남양군 태생입니다. 신야현이죠.”
“허. 왜 우리 주공한테 오지 않고.”
“유표는 싫었고 선제폐하의 경우에는 승상께서 가담하기 전의 모습을 알았으니까요. 언젠가는 신야에 날벼락을 끌어낼 분이라 여겨 일찌감치 서촉으로 도망갔습니다. 자리를 잡고 가정까지 만들고 나니 장판파와 적벽의 싸움 이야기가 들리더군요. 이야기를 들을 때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한복판에 있었던 사건을 바깥에서 관망한 이의 입으로 듣는 것은 늘 겪는 일이었다. 조운은 흥미롭게 등지의 말을 경청했다. 같은 난세를 살았지만 난세 자체는 놓치고 말았다. 등지는 그런 채로 늙는 것을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이 사람은 아직도 젊었다.
자신은 늙었다. 멀지 않은 날에 군을 이끌 수 없게 될 거란 예감이 들었다. 그것은 말하지 않았다. 제갈량에게도 말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다만 젊은 사람들을 키울 것이다. 자신마저 떠날 때 제갈량과 촉에 남겨줄 것이 있어야 한다.
등지는 남겨 주리라고 생각한 사람 중 하나였다. 지나치게 옛 사람들을 닮은 사람이다. 그 맑은 고집을 관철하는 삶은 쉽게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 자신이 시대와 맞지 않는다면 더욱 그렇다. 어느 날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피로가 쌓인 것을 깨달으면 그도 갑자기 늙어버릴 것이다. 그런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남아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힘이 닿는 한 가르치고 다듬으리라.
게다가, 어쩌면 벗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 남정입니다.”

누군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장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고개를 빼고 바라봤다. 익숙한 분지에는 안개가 가득 고여 있었다. 넘실거리는 안개 위로 얼핏 영채의 높다란 망루가 보였다. 저기까지 내려가는 길은 또다시 천 길 낭떠러지다. 게다가 눈이 얼어붙어 있었다. 숱하게 오르내려 훤히 아는 길이었지만 군졸들은 길의 초입에서 머뭇거렸다. 눈치만 보는 군졸들 사이에서 조운의 말이 불쑥 걸어 나왔다.

“괜찮아. 사는 것도 낭떠러지 위를 걷는 거야. 사는 건 잘들 하고 있지 않나.”

조운은 말을 몰아 앞으로 나아갔다. 열 때문에 조금 어지러웠지만 그다지 두렵진 않았다.
느긋한 말발굽소리가 안개 속으로 사라져갔다.




----------------------------------------------------------------------
원래 의도는 이게 아니었는데 왠지 용의 부활처럼 되어 버렸네요. 스크롤만 길고.;
Comments
김성미  (2010.11.17-19:39:55) 
견습기사님 글은 잔잔하게 닿는 게 정말 기분 좋습니다
문체가 너무 마음에 들어요 ㅜ.ㅜ
Twin  (2010.11.27-20:40:22) 
적적한 분위기가 굉장히 좋아요..ㅠㅠ
글은 읽는 법밖에 몰라서 마냥 좋다는 말밖에는...
건필하세욧!!
izya  (2012.02.20-03:04:57)  
2010년의 글이네요. 잘 읽고 갑니다. 신화나 다름없는 이야기속 인물이 '인간'이 되어 전해져옵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list
Prev  いちご-いちえ (一期一絵) - 序 [2] 제룡 2010.11.17
Next  斷崖 -上- 견습기사 2010.11.02


Copyright 1999-2018 Zeroboard / skin by Lushvil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