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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습기사]  斷崖 -上-  2010.11.02-20:0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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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의 1차 북벌이 배경이기 때문에 위나라팬에게는 불편할 수 있는 표현이 약간 들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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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애斷崖

  

1.

일군의 기병이 내달렸다. 분지가 진동했다. 흙이 떨리고 바위가 움츠렸다. 거듭된 함성에 귀가 먹먹했다. 언덕에 선 말들은 분지를 내려다보며 코웃음치듯 투레질했다. 쉽게 흥분하지 않는 것은 전장의 공기에 익숙하다는 증거였다. 말을 모는 사람들 역시 흥분한 기색이 전혀 없었다. 꽤 오랫동안 말발굽과 사람의 발로 다져져 먼지조차 일지 않는 산야를 굽어보며 제갈량이 입을 열었다.

"이번에 데려가 주셨으면 하는 이가 있습니다."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선 노장은 기병의 움직임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누굽니까?"
"등지입니다."

조운은 눈썹을 모았다. 약간의 주저 끝에 입이 열렸다.

"상서의 등백묘 말씀입니까? 오에 사신으로 갔던."
"그 등지입니다. 그를 부장으로 써주십시오."

상서라면 문관이다. 게다가 조운이 알기로 등지는 지천명의 나이였다.

"알겠습니다."
"이유를 묻지 않으시는군요."
"제가 알아야 하는 거라면 승상이 말씀하시겠지요. 그래서, 제가 등지에게 무엇을 해주면 되는 겁니까?"

군대는 상명하복이다. 보직이동에 대해 설명을 요구하거나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제갈량도 조운도 그것을 잘 알았다. 그렇지만 제갈량은 굳이 조운에게 말해줬다. 등지에게 군무를 전혀 모르는 문관도 할 수 있는 일을 맡길 요량이라면 하지 않을 일이었다. 제갈량은 싱긋 웃었다. 조운과의 대화는 이야기가 빨라서 좋았다.

"그를 양무장군으로 추천할 겁니다."
"법효직 같은 재목인가 봅니다."
"그렇습니다. 그 사람을 조장군께 맡기고 싶습니다."

제갈량이 바라는 것은 등지가 전선에서 전투를 경험하는 것이었다. 그를 장수로 만들고 싶었다. 나이나 경력은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의 촉에는 안심하고 한 방면의 일군을 맡길 수 있는 장수가 턱없이 부족하다. 가능성이 있는 자는 누구라도 발탁해서 힘껏 단련해야 한다.

"헌데 저는 마속이 제 밑에 올 줄 알았습니다."
"유상은 제가 맡아볼 생각입니다. 게다가 자룡이 아니면 백묘를 부탁할 수 없습니다."

제갈량의 미소 띤 얼굴에서 곤란해 하는 것 같은 기색을 본 조운은 재빨리 등지에 대해 아는 것들을 떠올려 보았다. 거의 없었다. 애초에 문관과 무관은 자리를 함께 하는 경우가 적은 것이다. 어차피 만나보면 알게 된다. 게다가 제갈량이 명령 한 마디로 끝내도 될 것을 굳이 부탁해온 일에 거절할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흐음.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마침 저기 오는군요."

조운은 고개를 돌렸다. 가벼운 차림의 중년 남자가 언덕을 올라왔다. 험지에서 말을 모는 솜씨가 제법 능숙했다.

“성도에서 군량을 가져왔습니다.”
“예까지 오느라 수고했네. 말씀드린 등지입니다. 백묘, 이분은 진동장군 조자룡이다.”

등지는 말 위에서 예를 갖췄다. 가까이에서 본 그는 깡마르고 질긴 인상이었다. 미간에 깊이 새겨진 내천 자와 나이에 맞지 않게 반짝거리는 새까만 눈이 눈에 띄었다.

“다음 명을 받을 때까지 한중에 머물며 군량배급을 감독하게.”

등지는 거듭 예를 갖추고 말을 돌렸다. 그가 시야에서 벗어나자 조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군량입니까. 교위들과 낯을 익히기 좋겠군요.”
“빨리 익힐수록 좋지요. 저 이에 대해 아시는 게 있습니까?”
“말을 잘 한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있습니다. 대담하다는 이야기도.”
“대단히 강직하기도 하지요. 그른 것을 보면 결코 그냥 넘기지 않습니다.”
“흠. 잔소리는 보통 늙은 쪽이 젊은 쪽에게 하는 거라 생각했습니다만.”
“선제께서도 가끔은 그런 생각을 하셨을 겁니다. 입 밖으로 내어 표내지 않을 뿐이지.”

조운은 슬쩍 눈썹을 모았다. 주름살 사이에 교묘히 숨은 내천 자가 미간 깊이 새겨졌다. 문득 생각난 것이 있어 미간을 만져본 조운은 입을 다물어 반론을 삼켰다. 제갈량은 소리 내어 웃으며 조운의 무릎을 두드렸다.

“내려갑시다. 보병훈련을 보고 싶습니다.”




2.

별다른 지위 없이 군량의 배급을 감독하던 까다로운 문관이 양무장군이 되어 나타났을 때 부장들은 놀라지 않았다. 하급자들끼리 통하는 소식통으로 대강의 눈치는 알고 있었다. 부장들은 등지의 임명이 먼 길을 떠나기 전 단행된 국정의 마무리 중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등지가 임명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성도에 출사의 표문이 올라갔다. 누구나 표문에 대해 이야기했다. 문자를 모르는 군졸들도 문자를 아는 이가 큰소리로 표문을 외우는 것을 듣고 싶어 했다. 그리고 울었다. 그 내용을 속속들이 이해하진 못하더라도 거기에 실린 마음까지 전해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거기에 위나라에서 맹달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참수 당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해가 바뀌면 야곡도로 진군할 거란 소문이 무성했다. 군졸들은 간절히 싸우고 싶었다. 그들이 정의라고 인정한 편에서 불의한 자들을 향해 칼을 휘두르고 싶어 했다.

“전의가 넘치는 건 좋지만 장수마저 흥분하면 어떡합니까. 문장은 장안을 잊는 게 좋을 겁니다.”

제갈량은 넌더리를 냈다. 조운은 대꾸하지 않고 지도를 말았다. 마지막 회의가 끝난 커다란 회의실에는 두 사람 밖에 없었다.

“북벌에는 동오 방면을 경계하는 군세를 제외한 촉의 모든 병력이 동원되었습니다. 전후를 살피지 않는 한 번의 도박에 그가 요구한 5천의 목숨만 올라가진 않아요. 설령 장안을 얻는다 해도 우리 병력에 비해 전선이 너무 확대된단 말입니다. 왜 문장이 제 전략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위연은 나름대로 전쟁을 빨리 끝내고 싶은 겁니다.”
“제장들도 제 책이 불필요하게 더디다고 생각할까요?”
“아니오. 옹양주의 백성들이 마음 깊이 우리에게 돌아서야 배후를 걱정하지 않고 장안을 칠 수 있습니다. 설령 공략에 실패하더라도 옹양주를 발판으로 다음 북벌을 준비할 수 있고요. 가정과 기곡을 막고 시간을 버는 동안 기산으로 가는 승상의 책이 합당합니다. 그렇게 생각했으니 다들 따르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왜 혼자 그걸 이해하지 못하느냔 겁니다.”
“처음부터 가정에는 마속을 보낼 생각이셨습니까?”

제갈량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 속에서 조운은 등지와 마속을 생각했다. 무장으로서는 검증되지 않은 신출내기들이었다. 등지는 이제 조운의 밑에서 첫 출전을 겪을 것이다. 마속은 남만 정벌에 동행한 경험이 있긴 했다. 전장의 분위기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단독으로 군을 이끈 경험은 없다. 그럼에도 제갈량은 마속에게 일군을 맡겨 가정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그에게 내려진 명령은 길을 지켜라, 그것 뿐. 회의에 참가한 많은 이들이 반대하고 우려했지만 제갈량은 굽히지 않았다. 기곡에서 야단법석을 떨어야 하는 조운과 달리 가정 쪽에서는 가만히 있기만 하면 된다. 노련한 왕평도 있다. 조운은 이미 결정된 일 보다는 위연에 대한 제갈량의 태도가 걱정스러웠다.

“본래는 위연을 생각했습니다만 자오도에 미련을 두는 한 1만 이상의 군대를 맡길 수 없습니다. 지켜야 할 곳에서 멋대로 뛰쳐나갈 겁니다.”

약간의 뜸을 들이고 나온 대답이 어딘가 변명같이 들린 것은 상대가 조운이기 때문일 것이다. 위연은 성정이 급하고 포악하지만 군사적인 능력은 인정할 만한 사람이다. 어느 정도는 위연이 자초한 일이라지만 일군을 맡길 수 있는 몇 안 되는 이가 제갈량의 신용을 얻지 못해선 곤란했다. 당장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이 가장 고약했다. 그렇지만. 조운은 미소를 지었다.

“사실 가장 뛰쳐나가고 싶은 건 공명 당신이 아니오.”

제갈량은 낯을 붉히며 탁자에 널린 죽간 뭉치를 쓰다듬었다. 촉이 드디어 위를 친다. 한나라 중흥의 비원을 걸고 선제의 유업을 이으려 한다. 촉군에서 가장 조용한 사람인 조운조차 어설픈 데가 있는 젊은 교위들을 훈련시키고 닦달하는 것으로 흥분을 다스리고 있었다. 하물며 누구나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는 표문을 직접 써 올린 사람임에야. 평소에는 바삐 일에만 매달리던 냉정한 이가 실은 뱃속에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불을 꾹꾹 눌러 담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많은 사람들이 놀랐다. 솔직히 말하자면 조운은 자신만 알던 것을 드디어 남들도 알게 되어 유쾌할 정도였다. 제갈량은 헛기침을 하며 얼른 화제를 돌렸다.

“백묘는 잘 하고 있습니까?”
“적응이 빠릅니다. 행군하는 동안 따로 5천명을 끌어보게 할겁니다.”
“5천명입니까. 빠르군요. 주위와는 어떻습니까?”
“별 문제는 없습니다. 소문만 들어보면 별 일로 다 떽떽거리는 친구인데 여기선 아주 조용합니다.”
“조장군의 부대이기 때문입니다.”

제갈량은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조운은 칭찬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하긴 저만큼이나 융통성이 없는 사람은 오랜만에 봅니다. 저렇게까지 규율에 충실한 장수는 병졸들에겐 악몽이지요. 저에게 익숙한 제 부하들이니 받아들이지 다른 부대였으면 약간 시간이 필요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조장군은 덕이 있으니까요. 규율에 엄격하다지만 조장군에 대해 불평하는 장졸은 없습니다. 어떤 식으로 하냐의 문제인 겁니다. 백묘는 그걸 다듬어야 해요.”

조운은 웃었다. 제갈량이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을 이제부터 깎아내야 할 젊은 인재처럼 말하는 게 재미있었다.

“선비치고 솔직함이 지나친 편이긴 합니다. 중앙에선 동오에 가기 전부터 꽤 유명했겠습니다.”
“그만큼 재능이 있는 사람입니다.”

단언하는 어투에 날카로운 감이 있다고 여겼는지 제갈량은 좀 더 편안한 자세로 비스듬히 기울어 앉았다.

“그가 지닌 솔직함은 어찌 보면 선비가 함양해야 마땅한 미덕입니다. 솔직하게 성을 낼 수 없는 탓에 저는 문장이 아니라 자룡 앞에서 말이 길어지는 겁니다.”
“저는 상관없지만 언젠가는 문장과 제대로 솔직한 이야기를 나누셨으면 좋겠군요. 여하간 사람들은 반대하는 부하에게도 화를 내지 않는 온화한 승상을 더 좋아할 겁니다. 비밀로 해드리지요. 특히 영식(令息)에게.”

제갈량은 뭔가 말하려는 듯 입을 열다 소리 없이 웃어버렸다. 조용해졌다. 잡담을 끝낼 때였다. 조운은 둘둘 말린 지도를 들고 일어섰다.

“슬슬 일어나겠습니다. 아침 일찍 출발해야 하니.”
“잘 부탁합니다.”

장에 가는 사람에게 사소한 걸 부탁하는 듯한 어조였다. 마치 며칠 후 금방 볼 것처럼. 회의실을 나오자마자 조운의 낯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는 이번 작전에서 자신이 맡은 임무의 무게를 생각했다. 그리고 유비를 생각했다. 유비는 전투에 임하기 전 한 사람 한 사람과 대화하곤 했다. 가정이나 여자 문제 같은 사소한 잡담이 주를 이루었다. 시답잖은 삶의 이야기로 낄낄거리면서 사람들은 죽음을 머리에서 지웠다. 곧 다시 만날 것처럼 주고받는 가벼운 인사들. 그렇게 인사를 나눴던 이들 중 이 낯선 북녘에 이르러 다음 인사를 준비하는 이는 이제 한 줌도 남지 않았다.
한 번 시작하자 일부러 잊은 얼굴들이 자꾸 떠올랐다. 같은 사람이 젊은 모습과 나이든 모습으로 동시에 떠오르기도 했다. 조운은 짜증스레 고개를 가로저어 얼굴들을 쫓아냈다. 그가 지휘해야 할 군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3.

서리가 내린 겨울 아침이었다. 남정에 집결했던 촉군이 울음을 가슴에 채우고 한(漢)의 깃발을 따라 일어섰다. 깃발은 북으로 향했다. 겨울로 접어든 계절에 산을 넘어 더욱 추운 북으로 향하는 것은 고되었다. 그렇지만 불평하는 자는 없었다.
작은 전투가 두어 번 있었다. 위군은 촉군이 야곡도로 올 거라 생각해 그쪽에 집중되어 있었다. 기곡 방면의 얼마 없던 위군은 불현듯 출현한 촉군 앞에서 쉽게 허물어졌다. 으스대는 젊은 교위들을 조운은 엄하게 꾸짖었다. 휘하병력만으로 어설프게 덤비다 압살당하는 자들이 없진 않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위군은 후퇴하는 쪽을 택했다. 조운도 굳이 그들을 심하게 닦아세우진 않았다. 살아서 후퇴한 자들은 상산 조자룡이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본대에 전할 것이다. 촉군 제1의 장수가 선봉이라면 그 뒤에는 제갈량이 이끄는 대군의 본진이 따르리라. 위군은 섣불리 촉의 총병력을 짐작할 수 없었다. 피해는 적지만 불안과 두려움을 안고 물러난 위군이 부리나케 달려온 조진의 휘하로 모여들었다. 모두 모이면 아마도 10만.
기곡에 들어가 위풍당당하게 진을 쳤다. 조운이 배치를 마치고 이틀 후 조진이 도착했다. 기곡의 저편 끝에 진을 친 조진은 이쪽을 살피는 데 주력했다. 기곡의 촉군은 기군(欺軍)이고 본대는 야곡으로 향하는 게 아닌지 아직 의심하는 모양이었다. 그 사이 조운은 조금씩 군을 움직여 유리한 지형에 방어물을 쌓기 시작했다. 조진이 보낸 척후들은 기웃거리게 내버려뒀다. 바깥에는 10만 명의 위군이 통발을 치듯 기곡과 야곡을 아울러 포위하고 있었다.
남정을 떠난 이래 처음으로 전령이 찾아왔다. 제갈량이 보낸 것이었다. 조운이 동북쪽의 위군을 자신에게 집중시키는 동안 제갈량은 조용히 서쪽의 기산을 쳤고 얼마 후 마속 역시 무사히 북쪽의 가정에 도착했다고 한다. 남안, 천수, 안정이 들끓었다. 백성들은 갓 세워진 위보다 익숙한 한을 더 좋아했다. 기산의 위군은 촉군이 이쪽으로 오리라곤 꿈에서도 생각하지 못한 데다 백성들의 배반을 우려해 틀어박힌 채 수비로 일관했다. 촉군은 기산을 포위했다. 압박은 심하지 않았다. 제갈량은 그 주변 지역의 일로 더 바쁜 모양이었다. 적병 뿐 아니라 백성들까지 상대하는 싸움이었다. 적병밖에 생각하지 않는 조운은 제갈량의 싸움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고 있을지 상상하려니 머리가 아팠다.

“보고합니다. 조진군에서 3만 보병이 출진했습니다. 기곡도를 통해 이쪽으로 곧장 다가오고 있습니다.”

게다가 딴생각을 할 틈이 없었다. 제갈량이 기산을 쳤다는 소식이 조진에게도 도착한 모양이었다. 조운은 탁자 위에 설치된 지형도를 내려다보았다. 기곡의 험준한 산지를 구불구불 관통하는 좁다란 길이 있다. 길의 양 끝에는 촉군과 위군의 본진이 있었다. 기곡은 어디서 시작되고 끊기는지 알 수 없을 만큼 들쑥날쑥한 봉우리와 절벽이 빼곡히 들어찬 땅이었다. 중요한 길은 대부분 깎아지른 듯한 벼랑에 박힌 잔도로 통한다. 통로로 쓸 만한 곳을 길로 그려놓으니 툭툭 끊긴 실낱을 잇대어놓은 것처럼 보였다. 대군은 신속하게 지나갈 수 없다. 한두 개의 출입구가 막히면 역시 드나들 수 없다. 본진을 중심으로 계곡 출구를 포위하는 것처럼 늘어선 나머지 위군들은 모양새만 그럴 뿐 실제로는 당장 안에 들어올 방법이 없었다.

“등지. 말해봐라. 왜 3만인가.”
“기곡도는 지형이 좁고 험한데다 시야가 좋지 않습니다. 여기서 싸운다면 많은 병사로는 오히려 불리합니다. 우리 숫자가 실질적으로는 그 정도밖에 안 되리라고 저쪽에서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는 겁니다.”

부장들은 등지의 의견에 이의가 없었다. 조운이 신참에게 가장 먼저 질문한 것에도 이의가 없었다. 10년 전 한중의 싸움에 참가했던 나이든 부장들은 아직도 당시의 양무장군이었던 법정을 기억했다.

“지형에 의지해서 싸우면 3만은 문제될 것 없어. 나머지 7만은 어떨까.”
“기곡과 야곡의 바깥에 나뉜 채 아직 움직이지 않을 겁니다. 기곡 안에서는 그 병력을 쓸 수 없습니다. 기껏해야 우리가 점거하지 않은 진입로를 찾거나 새로 길을 개척하기 위해 소수병력이 교대로 움직이는 정도일 겁니다. 그렇다고 당장 움직일 수도 없습니다. 이쪽으로 오는 촉군이 정말로 기곡도에 틀어박힌 3만이 전부인지 확신할 수 없을뿐더러, 3만이라도 기곡을 통과하면 상당히 위협적입니다. 진창에서 강을 타면 바로 장안이니까요. 우리의 별동대가 야곡을 통과할 가능성도 여전히 무시할 수 없겠지요.”
“그럼 7만은 잊자. 뒤가 끊길 염려는.”
“적이 물길을 타고 올 가능성은 있습니다. 그렇지만 급류를 거슬러 올라와야 하니 노고에 비해 얻는 게 없을 겁니다. 우리가 먼저 잔도를 차지하면 그마저도 쓸 수 없습니다. 보초를 두는 정도로 충분합니다. 길목만 틀어막으면 꽤 오랫동안 붙잡아놓을 수 있을 겁니다.”

조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등지는 조운군의 출병목적을 정확히 이해하고 상황을 판단했다. 부장들 사이에 이견이 없는 것을 확인한 조운은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지금 오는 3만은 본격적으로 우리를 치려는 게 아니다. 우리의 실제 병력을 확인해보고 가능하다면 지형 밖으로 끌어내려는 거야. 100명만 남기고 모두 내보내. 적당히 응하다 귀환한다. 본진에선 북을 치고 최대한 시끄럽게 굴어라.”

곧이어 조운은 부장들의 역할을 나누었다. 등지는 5천명을 이끌고 조운의 직속부대 바로 뒤에 배치되었다. 그에게는 제대로 된 첫 출전이었다. 한 달 전까지 붓을 들었던 자가 칼을 들어 자기 몸을 지킬 수 있으리라 생각하진 않았다. 그렇지만 전장의 무서움을 알지 못하는 군사는 독을 내놓을 수 있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단 한 번이라도 전장 한복판에 밀어 넣고 싶었다.
출진하기 직전 병사들을 둘러보던 조운은 어딘가 어설픈 갑주 차림으로 말에 오른 등지를 찾아내고 그쪽으로 다가갔다.

“낙마하지만 마. 대열만 벗어나지 않으면 아무 일 없을 걸세.”
“전장에서 목숨을 아까워하진 않습니다.”
“하긴 끓는 기름솥에 뛰어들려 했다던가. 그때 진심이었나?”
“그거 헛소문입니다. 그렇지만 손중모가 정말 기름솥을 준비했다면 저는 진심으로 뛰어들었을 겁니다.”
“그렇겠지. 그러나 자네 죽음에 내 장졸들까지 끌고 들어가진 마. 어설프게 굴면 군율대로 처단할 것이다.”

조운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깜짝 놀랄 만큼 냉엄한 말투였다. 등지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누구라도 위압당해 움츠러들 상황에서 등지는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고개를 쳐들었다.

“끝나고 뵙겠습니다.”

조운은 코웃음치고 말을 몰아 나아갔다. 진문이 열렸다. 북을 두드렸다. 군졸들은 착착 발소리를 맞춰 전진했다. 누군가가 외쳤다. 상산 조자룡이 왔다! 군졸들은 칼로 방패를 두드리고 창대로 땅을 찍으며 소리 질렀다. 상산 조자룡이 왔다! 3만의 함성은 하늘을 받치듯이 솟은 좌우의 절벽에 반향 되어 계곡 끝까지 울려 퍼졌다. 아직 보이지 않는 저편에서 대항하는 외침이 들렸다. 대위제국 만세! 메아리와 메아리가 만나 알아들을 수 없는 거대한 웅성거림으로 바뀌었다. 이제 적이 보이기 시작했다. 착착 착착, 수만 쌍의 발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밟아 누르며 나아갔다.
싸움은 싱거웠다. 서로의 군세와 사기를 엿보고 서로를 계곡 밖으로 밀쳐보려는 밀고 당기기가 주당끼리 붙은 가벼운 시비처럼 오갔다. 기책도 없었다. 외나무 다리 같은 좁은 길 위에서는 달리 쓸 수 있는 속임수가 없었다. 해가 기울고 밥을 지을 때가 가까워지자 양군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천천히 물러섰다. 이쪽이 한 걸음 물러서면 저쪽도 한 걸음 물러선다. 이쪽이 두 걸음 물러서면 저쪽도 두 걸음 물러선다. 마침내 땅거미가 지고 마지막 적병의 발소리가 계곡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촉군은 진으로 돌아갔다.
조운은 잠시 어두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계곡 안에서는 이제 뜨기 시작한 달이 보이지 않았다. 조진과 대치한지 닷새째였다. 조진은 더 이상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식사가 끝나자마자 부장들을 소집했다.

“식사 맛나게들 했나?”
“예!”

부장들은 큰 소리로 대답했다. 목소리에는 다음 전투를 예견한 긴장과 흥분이 배어있었다. 조운은 등지를 곁눈질했다. 다른 부장들보다는 덜 긴장한 모습이었다. 서전을 끝내고 귀환할 때 장졸들 틈에서 본 모습이 떠올랐다. 겉보기에는 단단히 벼르던 전장이 생각보다 싱거워 김이 빠진 고참병처럼 무덤덤했다. 그러나 고삐를 쥔 손은 허옇게 질려있었다. 그것이 조운의 마음에 들었다.

“조진은 곧 돌아온다. 7만이 거슬려. 그냥 포위에만 쓰기엔 아깝지 않은가.”
“우리가 기곡에서 못 나가고 있지만 놈들도 못 들어오고 있습니다. 대치가 길어질수록 역적 놈들만 손해입니다. 뭔가 할 겁니다.”

부장들 중 하나가 거들었다. 등지가 입을 열었다.

“오늘 접전으로 우리가 만만치 않다는 걸 확인했을 겁니다. 대치만 하는 건 좋지 않습니다. 조진의 목적은 우리가 아니라 기산입니다. 어떻게든 여길 빨리 지나고 싶을 겁니다. 대치가 길어지면 다소의 희생을 무릅쓰고 소부대별로 산을 타서라도 기산에 보내고 말겠지요. 우리가 적극적으로 싸움을 걸어야 합니다. 촉군이 기곡 전체를 장악하고 별동대로 다른 길을 찾는다는 인상을 주는 것도 좋겠습니다.”
“그쪽의 발목을 조금이라도 더 붙잡자는 것이군요.”
“실제로는 그쪽에서 보내는 별동대를 보는 족족 쓸어버리는 겁니까? 제가 가겠습니다.”

빠르게 의견의 일치를 본 부장들이 앞 다퉈 별동대 임무를 자원했다. 조운은 가벼운 고갯짓으로 그들을 제지했다.

“둘이면 돼. 3천씩이다. 하나는 내가 맡지. 본진은 기곡도를 굳게 방비한다. 여기로 싸움을 걸면 적절히 응해. 하지만 나가진 마.”

상산의 조자룡은 소수의 병력으로 적진을 휘젓고 다니는 대담함으로 유명하다. 조운이 본진을 비우면 조진은 가장 먼저 그것을 떠올릴 것이다. 조운을 잡기 위해 병력을 분산시켜 산을 헤매는 건 바보짓이다. 어차피 위군이 다짜고짜 본진을 치면 조운의 별동대는 반드시 나타날 터였다. 조진은 그것을 노릴 것이다. 조운이 노리는 것도 그것이다.

“적이 본진 쪽으로 올 수밖에 없도록 끌어들이는 건 좋습니다. 시간도 벌고요. 하지만 겨우 6천으로 조진의 본대 3만과 후위에 따라들어 올 게 뻔한 수만 사이에 끼고 싶진 않으시겠죠.”
“맞아. 그러니까 나는 안 나타날 거다. 내가 없는 동안 자네가 본진을 잘 지켜야 할 걸세. 할 수 있겠나?”

조진이 촉군 본진을 공격하려면 정면의 좁고 가파른 길로밖에 접근할 수 없다. 기곡도 안으로 위군이 얼마가 들어오든 본진을 직접 공격할 수 있는 병력은 한정된다. 등지는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흘. 아니 보름. 그 정도라면 할 수 있습니다.”
“맡기겠네, 양무장군. 주요방어거점의 건설상황은 어떤가?”

단독지휘경험이 없는데다 얼마 전까지 문관이었던 신참에게 본진을 맡기는 것을 불안해하는 부장들이 있었지만 조운은 듣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부장들의 보고가 이어졌다. 사실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보급로와 직결되는 가장 중요한 경로의 잔도 외에는 이제 나무를 베고 터를 닦기 시작한 정도에 불과하다는 것을 조운은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그 정도면 됐어. 지켜야 할 곳 말고는 다 복귀시켜. 모두 명심하라. 우리 목적은 조진군을 격퇴하는 게 아니다. 본대에 필요한 시간만큼 놈들을 잡아두는 것뿐이다. 무리하게 일을 벌이진 마라. 난 남의 뒤처리는 아주 질색이니까.”
“우리 부대의 업적으로 가장 유명한 건 뒤처리잖습니까?”
“그러니까 질색이란 말이다. 나는 기병대장으로 시작했어. 기병은 선봉이야. 그런데 몇 번 배후를 지킨 걸로 내가 뒤처리만 한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있지 않은가.”
“뭘 모르는 놈들입니다.”

부장들이 크게 웃었다. 등지만은 웃지 않았다. 그는 조운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아직 이 부대에서 통하는 농을 이해할 만큼 섞이진 않은 탓일 거라 생각했다.

“한 시진 뒤 출발한다. 백묘는 잠깐 같이 걷지.”




4.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진내를 가볍게 순시했다. 낮에 전투를 치른 데다 식사를 마친 후라 마음이 풀어질 법도 한데 손을 쉬고 있는 자가 없었다. 오로지 북벌을 위해 한중에서 공들여 키운 정병들이었다.

“내 부장들은 십 수 년 간 전장에서 사람 죽이기를 숨 쉬듯 해온 작자들이다. 다룰 수 있겠나?”
“촉한의 신하인 건 매한가지입니다. 그런데 정말로 저에게 본진의 총지휘를 맡기시는 겁니까?”
“할 수 있다면서.”
“말씀드린 기간까지는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조진이 다른 생각을 품지 않고 우리 본진에만 달려들게 하는 것 말입니다. 그동안 본진이 제 마음대로 바뀌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조운은 자신의 부대 운용에 고지식한 신참이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 부분이 있었나 생각했다. 딱히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있더라도 조운에게 곧장 직소할지언정 그가 없는 틈을 타 도둑질하듯이 해치울 사람이 아니었다. 등지가 집요하게 지휘권을 확인하는 것은 필요할 경우 조운의 지시를 어기고 본진을 나가 공격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로 들렸다.

“이야기나 하세. 나는 아직 자네를 잘 몰라. 부장들도 마찬가지다. 자네의 지위는 존중하겠지만 자네의 지휘를 따르는 건 내 판단에 의존할 거야.”
“생각 중이란 말씀이군요. 얼마든지 판단해 보십시오.”

촉과 오 사이에 얽힌 여러 가지 복잡한 역사 때문에 손권을 시답잖게 여기는 조운이었지만 지금만큼은 그에게 어떤 동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손권은 불리한 입장에 있는 주제 직설적으로 하고 싶은 말만 하는 사신에게 당혹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 건방진 말씨에도.

“사실 저는 조장군의 부대가 마음에 듭니다. 이보다 곧바르고 기강이 엄정한 사람들을 본 적이 없습니다. 이전까지 저는 병사란 군복을 입힌 무뢰배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본 자들은 관복을 입고 잰체하는 자들보다도 낫습니다. 이들이 무익한 피를 흘리게 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손권이 그 사신을 마음에 들어 한 것은 속을 숨기지 않는 시원스러움 때문인지도 모른다. 세상사를 모르지 않는 나이인데도 깜짝 놀랄 만큼 표리가 일치하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이치에 맞는 것을 추구했다. 군략을 묻든 생활을 묻든 그 점은 한결같았다.

“유장 시절에는 그리 쓰임 받지 못했다고 들었네.”
“그랬습니다.”

심각한 낯으로 이야기를 나누던 기병 몇이 조운을 발견하고 황급히 예를 표했다. 험한 한중과 기곡을 돌아다니면서 말 몇 마리의 굽에 문제가 생긴 모양이었다. 전담하는 교위는 따로 있고 문제도 금방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런 것을 총사령관이 직접 들어주자 기병들은 황송해했다. 그러고 보니 등지는 저런 눈으로 조운을 쳐다보지 않았다. 촉군의 역사이자 살아있는 전설처럼 된 그를 처음부터 능력이 있는 상사 이상으로 여기지 않는 듯했다.

“자네 같은 사람을 조금 알지. 어지간해선 출세할 팔자가 못 돼. 주인을 못 만나면 평생 한직에서 썩더군. 목숨이 위험해지기도 하고.”
“경험담입니까?”
“후회한 적은 없나?”
“조장군께서 저에 대해 어떤 소문을 들으셨을지는 짐작이 됩니다. 등백묘는 타협할 줄 모르고 고집이 세다, 교만하며 말이 지나치다, 사람들과 어울릴 줄 모르는 놈이다.”
“사물의 옳고 그름을 안다, 성실하고 재능이 있다는 말도 있었네.”
“저에 대해 좋게 말씀해주신 건 선제폐하와 승상 정도입니다. 나쁘게 말하는 소문도 완전히 틀린 건 아니니 부정할 생각은 없습니다. 예, 후회한 적은 없습니다. 저를 알아본 주인을 만났으니 이미 성공한 인생입니다.”
“여태까지 이렇게 살아왔으니 앞으로도 내버려두라 이건가.”
“뭐, 그런 겁니다.”
“고집이 세군.”
“감사합니다.”

농담인 건지 진담인 건지. 무서울 정도로 맑은 대신 어딘가 꼬여있다는 것은 알겠다. 어쩐지 신야 시절 이전부터 유비를 따랐던 옛 사람들을 떠올리게 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사람들이 너나할 것 없이 장단점을 털어놓고 화통하게 지내던 유비의 시대가 아니다. 등지는 중용은 되겠지만 앞으로도 주인을 만나지 못한 시절처럼 적적한 길을 가게 될 것이다. 적절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조운은 그런 기분이 들었다.

“제가 질문해도 되겠습니까? 저도 조장군을 잘 모릅니다.”

어쨌거나 이런 식으로 말을 거는 부하는 본 적이 없었다.

“해봐.”
“조장군도 남한테 불평해본 적이 있으십니까?”
“왜 없겠나.”

의아한 기색이 사라졌을 때 조운의 낯에서는 표정을 찾아볼 수 없었다.

“요즘에는 안 해. 쓸데없는 짓이야.”
“소문으로 들은 조장군은 너무 완벽한 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소문인 거지. 완벽하지 못해서 실망스럽던가?”
“지레짐작하지 마십쇼.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이 부대가 대단히 마음에 듭니다. 이런 장졸들을 키워낸 분도 마음에 든단 말입니다.”
“내가 부하와 대화하는 건지 윗사람과 대화하는 건지.”
“참 피곤하게 사셨겠다 싶어서 그렇습니다. 별 뜻은 없습니다.”

조운은 대꾸하지 않았다. 대화가 끊겼다. 별자리가 기울어진 정도를 가늠해본 조운은 갑자기 말머리를 돌렸다. 고삐를 쓰지 않는 멋진 솜씨였다.

“대장은 자네야. 내가 돌아오기 전에 기곡을 돌파당하지만 않으면 돼.”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만 말수는 줄이는 편이 좋을 걸세.”

등 뒤에 있는 사람의 표정은 볼 수 없다. 그리 신경 쓰이지도 않았다. 조운은 말을 가볍게 달렸다. 출진준비를 해야 했다.




5.

피곤하게 살 거란 핀잔을 처음 들은 건 수염도 나지 않은 애송이 때의 일이었다.
충신은 공(公)과 대의를 우선한다고 배웠다. 그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실천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세상은 옳지 않기에. 철없던 시절에는 세상에 대해서도 그런 엄격함을 요구했다. 그것이 정말 철없는 짓이라는 걸 깨우친 후에는 엄격함이 좀 더 내부로 향했다. 자신을 다스리고 사람을 가려 사귀었으며 부하들을 단속했다. 윗사람에게는 서슴없이 직언을 올렸다. 알게 모르게 손해를 본 일이 있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무시할 것에도 자신은 마음을 써야 했다. 아랑곳하지 않았다. 정말 가까운 소수의 사람들이 눈치를 살펴오면 대범한 척 웃어넘길 뿐이었다. 지위가 올라가자 신기하게도 사람들 역시 알아서 조심하기 시작했다. 직언이나 잔소리를 들으면 본래 고지식한 사람이려니 인정하고 들어줬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눈치라도 채주던 몇 안 되는 사람들은 대부분 죽었다. 유일하게 남아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추스르기도 버거울 만큼 나랏일에 짓눌렸다. 그가 투덜거리는 건 들어줘도 그에게 투덜거리진 않게 되었다. 그 때문에 미안해하고 가끔은 섭섭해 하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승상에게만은 아주 사소한 걱정거리라도 내비치지 않도록 조심했다. 습관적인 행동이었다. 어차피 어지간한 일로는 신경 쓰이지 않을 만큼 자기 자신에 대해 적당히 둔감해진지 오래였다. 피곤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자신의 고집을 견지할 수 있는 삶은 썩 만족스러웠다.
그게 어쨌단 말인가. 오랫동안 사귄 사람도 건들지 않는 것을 어째서 면식조차 짧은 신참이 피곤하겠다느니 평가를 내리는 것인가. 닳을 만큼 닳았다고 생각했는데 새삼 불쾌감을 느끼는 것은 또 어째서인가. 조운은 미간을 찡그렸다. 오래 곱씹고 싶진 않았다. 진문이 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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