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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습기사]  潛龍交雲 -下- [4] 2010.07.09-23:5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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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빙 둘러가는 길로 유랑민들을 추격하던 패거리는 그 길을 막으며 불쑥 나타난 남자에 깜짝 놀랐다. 그들을 더욱 놀라게 한 것은 남자가 꺼낸 말이었다.

“그러니까 형씨가 우리 패를 접수하겠다고라?”
“그래.”

도적패가 와 하고 큰 소리로 웃었다. 10 대 1. 남자의 등 뒤에 고삐를 잡고 선 소년은 키는 크지만 한눈에 보아도 전력 밖이다.

“겁대가리를 상실한 놈! 칼 좀 쓴다고 뻐기나 본데, 우리 형님은 전장에서 도합 100명의 목을 자른 어른이시다!”
“그게 어쨌다는 거냐?”

남자는 시큰둥했다. 대장은 신음하다시피 으르렁거렸다. 앞으로 나온 대장이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남자는 뒤편의 패거리에 눈길을 던졌다.

“해보려는 놈이 있다면 지금 다 나와라. 한꺼번에 덤벼도 좋다.”

서서히 웃음소리가 잦아들었다. 남자가 일격에 나무를 베더란 수군거림이 새나왔다. 대장은 사람 백 명을 죽였으니 나무꾼보다는 낫다며 누군가가 소리를 높였다. 맞장구를 치면서도 패거리들은 확신이 없는 얼굴이었다.
가장 확신이 없는 건 대장 자신이었다. 눈앞의 남자는 일대일대결을 유도하기 위해 일부러 기백을 지우고 있었다. 본능은 전원이 일시에 달려들어야 한다고 끊임없이 경고했다. 그것을 입 밖으로 말할 수 없었다. 이런 패거리에서는 약해보이면 두령 자리를 유지할 수 없다. 죽던가, 죽여야 한다. 대장은 휘청이다시피 한 발을 내딛었다.



8.

저물 무렵 잠시 비가 그쳤다. 바람이 찼다. 구름과 안개가 뒤엉켜 산허리를 타고 흘러내렸다. 하늘을 쳐다보는 눈들에 근심이 어렸다. 조금씩 기침을 뱉는 사람이 늘어났다. 소년은 장작거리를 주우면서 나무의 자람을 눈여겨보았다. 구불거리긴 했지만 길은 꾸준히 동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얼마를 더 걸어야 마을이 나올지는 알 수 없었다. 소년은 이마를 짚었다. 미열이 느껴졌다.

“아고고, 삭신이야. 형님은 전에 어디 계셨소? 어디 있든 한가락 했을 솜씬데.”

대장이 반 토막 난 극을 짚고 어기적거리며 다가왔다. 대장의 팔에는 부목이 묶여있었다. 남자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소년이 대신 고개를 돌렸다.

“다들 싸움에 익숙한 것 같더군요. 무술에 뛰어난 사람은 여러 곳에서 환영받습니다. 어쩌다 이런 데서 도적질을 하게 된 겁니까?”
“무술말요. 헤헤. 중원에서 별 깃발을 다 따라봤수다. 여포, 조조, 원소, 유비.”
“유비?”

남자가 관심을 보였다. 대장은 침을 튀기며 설을 풀기 시작했다.

“얘기하자면 깁니다요. 이놈들은 각지에서 왔고, 저는 연주 사람입죠. 어느 날 여포군에 징집되어 영문도 모르고 끌려 다니다 조조군이 됐는데, 이게 아무래도 원소가 이길 거 같아서 원소한테 도망쳤죠. 근데 원소가 깨지데요? 거기서 제가 그 유명한 관운장을 이 두 눈으로 직접 봤다 아닙니까! 대추같이 붉은 얼굴에 수염은 두 자나 되고.”
“그건 됐어. 원소 다음 이야기나 해.”
“엥, 형님. 남들은 다 그 대목을 제일 좋아하는뎁쇼? 아, 알았습니다요, 오늘 말고 나중에 날 잡아 자세히 설을 풀어드립죠. 하여간 원소는 안 되겠다 싶어 유비가 나갈 때 따라 나왔습니다요. 근데 거기엔 귀신이 있더라고! 혹시라도 장비란 작자하고 얽힐 일은 만들지 않는 게 좋을 거요. 그 귀신을 잡아다 씹할 종자가 아오, 별 걸로 어찌나 사람을 굴려대는지 진짜로 죽는 놈이 나와요. 거기선 전쟁 때문이 아니라 맞아서 죽는다니까! 정말 끝장이구나 싶은 순간 천운으로 조조가 공격하더이다. 냅다 튀었죠. 거기서 만난 놈들끼리 뭉쳐 여차저차 흘러 다니다 양식이 떨어져 어쩔 수 없이 손을 쓴다는 게, 헤헤헤.”
“네가 한 이야기는 모두 사실이냐?”
“이를 말입니까요! 공갈은 좀 쳐도 거짓말은 안 합니다!”
“그렇다면 익덕이 가르친 군율을 알겠군. 유황숙께서는 전장 밖에서의 약탈을 엄금하신다. 어기는 자는 사형이다. 탈영 또한 마찬가지다.”

소년과 대장이 동시에 남자를 쳐다보았다. 말에서 내려온 남자는 예의 무표정한 낯으로 칼에 손을 가져갔다. 대장의 얼굴이 경련을 일으켰다. 사람이 철퍽 주저앉는 소리를 듣고 앞서가던 패거리가 뒤를 돌아보았다. 대장이 극을 내던진 채 진창 위에 엎드려있었다.

“혀, 아니 자, 장군님! 죽을죄를 졌습니다! 우, 우, 우린 칼밥 좀 먹은 놈들입니다요. 황숙님은 칼 잘 쓰는 병사가 많이 필요하실 텐데, 아 난세니까 별일 다 있을 수 있는 거 아닙니까! 군대 꼬라지도 못 갖춘 판에 깃발 걸어봤자…!”

칼이 뽑혀 나왔다. 남자의 눈은 전장에서 적병을 만난 것 같았다.

“살려 주십쇼! 제발 사, 살려만 주십쇼! 하라는 건 뭐든 다 하겠습니다!”

대장은 땅바닥에 이마를 짓찧었다. 패거리는 입을 다물고 주춤 물러서서 상황을 살폈다. 여차하면 자기들끼리 도망칠 기색이었다. 남자는 칼을 치켜들면서 패거리에게도 눈길을 주었다. 거기 꼼짝 말고 있어. 무언의 명령에 패거리의 발이 얼어붙었다. 대장 쪽으로 눈을 돌린 남자는 소년이 가로막고 선 것을 발견했다.

“대인께서는 어찌 됐든 이들 무리의 두령입니다. 끝까지 돌봐주셔야 합니다.”
“두령이니까 잘못에는 죄를 물어야 한다. 비켜라.”
“이자를 베면 나머지도 모두 베어야 합니다. 흩어지기 전에요.”

도적패가 흩어져 달아나면 일일이 추격하지 못한다. 그러면 전혀 통제할 수 없게 된다. 남자는 입을 꾹 다물었다. 소년은 상기된 낯으로 말을 이었다.

“대인께 이들을 백성으로 되돌려 보이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남자는 소년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쳇 혀 차는 소리가 났다. 남자는 칼을 크게 휘둘러 엉긴 습기를 털어내고 돌아섰다. 긴장이 묽어졌다. 몇 사람은 힘겨운 낯으로 무릎을 짚었고 몇 사람은 웃으며 남자에게 굽실거렸다. 등을 돌린 남자로부터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소년은 대장에게 말을 걸었다.

“슬슬 오늘 쉴 자리를 찾는 게 좋겠습니다.”



9.

젖은 생나무에서 매운 연기가 피어올랐다. 연기가 흘러나가는 바위절벽 위로 후두둑 빗방울이 떨어졌다. 누군가가 하늘을 욕한 순간 먼 곳에서 허연빛이 번득였다. 우루룽, 공기가 불길하게 으르렁거렸다.

“작은형님이 여길 못 찾았음 오늘 얼어 죽든 벼락을 맞든 황천 갔겠어요.”

누군가가 말을 붙였다. 소년은 자신에 대한 호칭이 마음에 들지 않아 대꾸하지 않았다. 패거리는 불에 투구를 걸고 남자가 내준 약간의 마른식량에 물을 잔뜩 넣어 끓이기 시작했다. 물이 어디서 났는지 의아해하는 소년에게 패거리 중 하나가 불빛이 닿지 않는 깊은 안쪽을 가리켰다. 들어갈수록 이끼냄새가 진해졌다. 갈라진 바위벽에서는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는 그곳에서 손바닥으로 물을 받고 있었다. 기척을 느낀 남자는 어깨 너머로 고개를 조금 돌려 아는 시늉을 했다.

“유황숙은 군율에 관한 한 추상같은 분인가 보군요.”
“인자한 분이다. 그러나 죄를 지은 자는 결코 사면하지 않는 분이다.”
“어떻게 인덕을 사용해야 하는지 아시는군요.”
“사용한다라. 그분은 그 이상이야. 진심이거든.”
“어느 정도는 짐작했지만 유황숙과 그리 가까운 분일 줄은 몰랐습니다.”
“보잘것없는 부곡이다. 자네가 생각하는 그런 것은 아니야. 그보다, 자네야말로 정체가 뭐야. 중원의 정세에 지나치게 밝은데.”
“그냥 이야기 듣는 걸 좋아하는 시골사람입니다.”

말이 남자의 손에서 물을 핥아먹었다. 남자는 말에게 먹을 것을 제대로 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속삭였다. 물을 먹인 후 남자는 나뭇가지로 말의 털을 빗기기 시작했다. 돌아선 등은 할 말이 있어보였다. 소년은 기다렸다. 한참 만에 나온 말은 짤막했다.

“미안하다.”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소년은 보류해두었던 의문 중 하나를 떠올렸다.

“어차피 대인이 관원이라는 건 어떻게든 밝혀질 터였습니다.”
“자중하지 못한 건 내 잘못이다. 자네 계획에서 변경해야 할 것이라도?”
“형주군에 입대시킬 때 유황숙의 이름으로 신원을 보장해주리라 확언을 주십시오. 신분을 드러내면 곤란하시리란 건 압니다. 그렇게 말만 들려주시면 됩니다.”

어둠 속에서 남자의 형체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처럼 움직였다.
갑자기, 소년은 남자가 무섭게 느껴진 이유를 깨달았다. 남자는 쭉 소년을 관찰하고 있었다. 원한다면 얼마든지 남자의 뜻대로 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소년의 판단을 따르면서 그것이 어떤 결과를 끌어내는지 냉정히 지켜보는 쪽을 택한 것이다. 무엇을 원하는 것일까? 지끈거리던 머리가 한순간 맑아졌다.

“언제쯤 시험을 끝낼 생각이십니까?”

기척이 느려졌다. 남자는 단어를 고르는 것 같았다.

“글쎄. 우선은 저 치들 건부터 끝내야 하지 않을까.”
“아직 판단이 선 건 아니란 말씀이군요. 못미덥습니까?”
“아직 판단이 선 건 아니라서.”
“뭐, 상관없습니다. 저는 사관할 생각이 없으니까요.”

소년은 남자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남자는 차분했다.

“이유를 들을 수 있을까?”
“조맹덕이 장강 이북을 완전히 장악하는 동안 형주에 갇힌 유황숙은 평화에 익숙해지고 세월 속에서 썩게 될 것입니다. 그토록 패배를 거듭한 분이 불혹에 이르러서야 평화를 맛보고, 그 시간이 10년 가까이 이어지는데 끝내 뜻을 흐리지 않으리라 장담하실 수 있습니까? 설령 뜻을 보전한다 해도 지금보다 더욱 강대해질 조맹덕에게 어디까지 대항할 수 있겠습니까? 대인 역시 고민한 적이 없진 않으실 겁니다. 젊은 분이니까요.”

말이 귀를 쫑긋하며 주인을 돌아보았다. 남자의 그림자가 굳어져있었다.

“자네 예측이 반드시 맞으리란 법은 없어.”

시간을 두고 나온 반론은 어딘가 약하게 들렸다. 소년은 이제 겨우 이립에 접어들었을 남자가 조금은 안타깝다고 생각했다.

“조맹덕은 천시(天時)를 가졌습니다. 조만간 대적할 자가 없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힘에 굴복한 것뿐이야.”
“유황숙은 사람이 따르는데도 왜 아직까지 기반조차 없습니까?”
“그건 보필하는 우리가 부족해서….”
“그분은 효웅입니다. 여기서 사라지거나, 조조처럼 힘을 사용하게 되겠지요.”
“함부로 지껄이지 마라. 그분은 다르다!”

갑자기 말이 투레질하며 남자의 팔에 머리를 부볐다. 남자는 낮은 목소리로 사과하면서 방금 세게 긁어버린 곳을 쓰다듬었다. 등을 돌린 채 올곧게 말에만 신경을 쏟아 붓는 모습은 대화가 잠시라도 끊긴 것을 반기는 느낌조차 있었다. 소년은 조용히 말했다.

“저는 누구에게도 사관할 생각이 없습니다.”

남자의 손길이 아주 약간 느려졌다.

“지금 서주는 그 조조에 의해 재건되고 있다더군요. 제가 서주에서 보고 겪은 것들은 조조가 특별히 포악하기 때문에 일어난 게 아니었습니다. 천하를 노리는 이들의 행보는 어느 것이나 피투성이입니다. 그것을 얼마나 잘 포장하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 출사라는 것이 시산혈하에 재주를 파는 것이라면 저는 촌부가 되어 정직하게 흙을 지고 살 것입니다.
제 미천한 재주를 평가해주신 것은 감사합니다. 그렇지만 지금부터는 고향을 떠난 백성들과 본래 백성이었던 자들을 위해 도와주십시오.”

남자는 고개를 돌렸다. 소년은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언어를 대신해 안광이 교차했다. 소년이 말을 들려준 상대는 소년 자신인 것 같다고 남자는 생각했다. 그리고 그 이야기 속에 밴 옅은 우울함을 곱씹어보았다. 남자는 고개를 바로 했다.

“그래. 알았다.”

소년은 서로의 표정이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두워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저편이 웅성거렸다. 가까운 곳에 벼락이 떨어졌는지 바위가 우루룽 진동했다. 동시에 낭패스러워하는 짧은 비명이 터졌다. 소년은 남자에게 손을 저어 보이고 먼저 나갔다. 밝은 곳으로 한 발을 내딛은 순간 피 냄새가 훅 다가왔다. 대장은 당황하며 쓰러진 사람의 몸에서 극을 뽑아냈다. 대장을 향한 무표정한 눈들이 소년을 발견하고 크게 흔들렸다. 대장과 소년의 눈이 마주쳤다.



10.

하늘을 찢는 소리가 터졌다. 공기와 바위와 땅이 바르르 떨었다.
역시 저놈은 베었어야 했는데. 남자는 막 얹은 안장에서 손을 떼며 침묵했다. 횃불을 든 패거리와 함께 들이닥친 대장은 한손에 소년을 붙들고 있었다. 대장은 목이 잘 보이도록 키 큰 소년의 머리채를 잡아당겼다. 목에 닿은 피 묻은 극이 부들부들 떨렸다.

“어디서 봤나 했는데 이제 생각났지. 여남에 있을 때 댁이 도적이 된 탈영병을 잡아다 처형한 걸 본 적이 있어. 주제에 우릴 거둬주겠다고? 지랄.”

남자를 쳐다보던 소년이 허공으로 눈길을 돌렸다.

“실망스럽다. 인망이 없는 사람이었다니.”
“아니, 무장들 중에서는 나름 성격이 좋다는 평을 듣는데 말이다.”

남자가 반사적으로 내뱉은 말에는 정말로 서운해 하는 느낌이 있었다. 대장은 충혈된 채 떨리는 눈을 사납게 굴리더니 소년의 목에 극을 바짝 눌렀다.

“여유부리지 마! 내 말대로 안 하면 그어버린다!”
“그러던가.”

패거리의 눈이 희번덕거렸다. 남자는 손을 늘어뜨린 채 걸어 나왔다.

“한 가지는 알아둬. 네놈들을 살려달라고 매달린 건 그 친구다. 방해되는 녀석이 없어지면 나는 내 마음대로 할 수 있겠지.”

남자가 자연스럽게 다가오자 기에 눌린 패거리는 엉거주춤 물러섰다. 남자는 대장을 주시하면서 패거리 전체를 시야에 담았다. 몇몇에게서는 무기를 내민 각도에 망설임이 보였다. 패거리 전부가 대장의 행동에 동의하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남자가 반 토막 난 극의 범위 안까지 다가오자 대장은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되었다. 대장은 괴성을 지르며 소년을 집어던졌다. 소년의 어깨 너머로 꿰뚫을 듯이 극이 날아들었다. 남자는 한 팔로 소년을 휘감으면서 다른 팔로 침착하게 극을 붙잡았다. 실린 힘을 흘리듯이 잡아당기며 반 바퀴 회전한다. 대장은 남자를 지나쳐 몇 걸음 달려 나가더니 극을 내민 채 고꾸라졌다. 빗나간 극이 젖은 바위틈에 꽂혔다. 거기서 푸르스름한 기운이 튀는 걸 본 것 같았다. 말이 불안해하며 남자에게 들러붙었다. 무서운 깨달음과 공포가 소년을 덮쳤다. 소년은 칼을 뽑으려는 남자를 제지하면서 잡히는 대로 말갈기를 잡아당겼다.

“여기서 나가야 합니다. 어서요.”

허둥거리며 일어선 대장이 극을 뽑아들었다. 물이 튀었다. 벌컥 화를 내려던 남자의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잡혔다. 단단한 것에 금이 쭉쭉 뻗어가는 것 같은 그 희미한 소리는 천둥과는 분명 다른 것이었다. 소년은 억지로 남자를 붙들고 패거리 쪽으로 달려들었다.

“살고 싶으면 나가요!”
“저 새끼들 붙잡아! 잡으라고!”

소년의 고함과 대장의 악다구니가 동시에 터진 순간, 벽이 우르르 흔들렸다. 습한 공기에서 벼락의 냄새가 났다. 젖은 바위벽으로부터 불꽃같은 것이 튀어 대장이 쥔 극으로 달려들었다. 한순간 사물이 정지된 것 같았다. 대장이 거품을 뿜으며 나동그라졌다. 고기와 기름이 타는 내가 풍겼다. 그 위로 바위부스러기가 쏟아져 내렸다. 천장과 벽이 쩍쩍 갈라졌다. 남자와 소년은 동시에 말의 엉덩이를 후려갈겼다. 멍청히 선 패거리를 뚫고 말이 가장 먼저 뛰쳐나갔다. 패거리가 정신을 차렸다. 빠져나가기 위해 서로 밀치고 짓밟는 악다구니가 벌어졌다. 바위는 안쪽에서부터 조각조각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11.

산봉우리에 푸르스름한 불꽃이 영글면서 일순간 주위의 색이 바랬다. 얼어붙은 빗발이 채찍처럼 비스듬히 날아들었다. 땅의 진동이 채 가라앉지 않은 바위무더기 앞에서 무리는 하늘의 노성을 듣고 얼이 빠진 것처럼 주저앉아있었다.
가장 먼저 정신을 추스른 것은 남자였다. 남자는 우선 빠져나온 인원을 헤아렸다. 모두 열 명. 크게 다친 사람은 없어 보였다. 그중에서 소년을 발견한 남자는 안도하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소년은 땅바닥에 엎드리다시피 몸을 굽힌 채 움직이지 않았다. 다가간 남자는 벼락 치듯 무릎을 꿇었다. 소년이 부여잡은 곳에서 피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이봐.”

소란의 와중에 함부로 휘둘린 날붙이가 소년의 몸에 꽂힌 채 부러진 모양이었다. 남자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려 했다. 소년이 남자의 소매를 붙들었다.

“쇠붙이는, 모두, 버리도록….”

남자는 소년을 내려다보았다. 분노와 다름없는 강한 거부감이 이성에 의해 간신히 억압되었다. 남자는 가까이 있던 자에게 턱짓했다. 패거리는 재빨리 무기를 한데모아 가지만 남은 낮은 수목 밑에 감췄다. 남자는 소년을 말에 실으려다 생각을 바꿔 어깨에 팔을 두르고 걷게 했다. 무리는 비와 낙뢰와 추위를 피해 움직였다. 급하게 도망치느라 도롱이 같은 것을 챙기지 못했다. 한밤중에 공복과 맨몸으로 뇌우가 쏟아지는 산을 헤매면서 무리는 빠르게 지쳐갔다. 눈이 감긴 채 비틀거리는 동료를 다그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정신 차려. 이런 데서 죽으면 안 돼.”

행렬의 중간에서 고삐를 당기며 남자는 거듭 소년을 격려했다. 쿨럭쿨럭, 길 바깥쪽을 향해 기침을 뱉은 남자는 문득 소년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예측했어야, 했다. 내가 예측했어야.”
“하늘이 한 일이다. 그런 건 인간이 어찌할 수 없어.”
“그렇지만, 사람이 할 수,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해야….”

소년은 잔기침을 뱉으며 휘청거렸다. 기침을 하다 몸에 꽂힌 칼날이 움직인 모양이었다. 정신이 번쩍 든 것처럼 소년은 어깨로 크게 숨을 쉬었다.

“저, 전투 중에는, 몸에 창칼이 꽂힌 채, 후우, 싸우기도 한다면서요?”

목소리는 여전히 약했지만 직전보다는 명료했다. 남자는 얼른 대꾸했다.

“돌볼 틈이 없으니까.”
“이거 대단히, 힘든데요. 군웅들은 이걸 아, 알면서, 싸우라고 명령하는 것이겠지요?”
“좋아. 잘 하고 있어. 계속 떠들어라. 정신을 잃으면 안 된다.”

앞쪽에서 비명 같은 환성이 터졌다. 사람이 다듬은 게 분명한 돌계단이 보였다. 계단을 따라 내려가자 얼마 안 가 지붕이 나타났다. 암자에 가까운 작은 집은 최근까지도 주인의 손길이 미쳤는지 잘 정돈되어 있었다. 패거리는 놀라운 속도로 아궁이에 불을 일으키고 요깃거리도 찾아냈다. 아궁이 앞의 좁은 공간에 덕지덕지 달라붙은 여덟 명은 자꾸 부엌에 기웃거리는 말을 밀쳐내며 안쪽을 흘끔거렸다.
남자는 침상에 소년을 눕히고 상처를 살폈다. 칼날은 왼편 옆구리의 늑골 사이에 꽂혀있었다. 그나마 뼈에 걸려 내장을 찌르진 못한 듯했다. 남자는 소년의 입에 이불을 물렸다.

“조금 아플 거다.”

칼날이 빠지면서 울컥 피가 흘렀다. 재빨리 눌러 지혈했다. 질화로를 들여온 누군가가 남자에게 벌겋게 단 부젓가락을 건넸다. 남자는 고개를 젓고 안장주머니에서 꺼내온 약주머니와 바늘을 늘어놓았다. 상처를 돌보는 솜씨가 익숙했다. 생살에 달군 바늘이 들어가는 고통 속에서 소년은 이를 악물어 신음소리를 삼켰다.

“다행이 상처가 중하진 않다. 지금 힘든 건 체력이 떨어져서야.”

남자는 패거리가 받아온 빗물에 손을 씻으며 말했다. 소년은 입에 문 이불을 뱉고 반쯤 감긴 눈으로 천장을 노려보았다. 힘겹게 숨을 몰아쉬면서도 입을 꾹 다물어 힘든 기색을 숨기려 노력하고 있었다. 남자는 재미있어하는 표정을 짓더니 땀을 닦아주었다.

“촌부는 자신이나 주위를 통제하려는 연습 따윈 안 하지.”

소년은 눈을 감았다. 이제부터 들을 말을 이미 짐작한 것 같다고 남자는 생각했다.

“너는 야심이 없는 녀석은 아니야. 이미 준비를 시작했는지도 모르겠군. 다만, 네 방식대로 현명하게 피를 흘리고 쓸 수 있는 주인이 아직 보이지 않는 것이겠지. 자신의 재주가 천하 만민에 미치리라 자신하다니 그 배포는 인정해야겠다.”
“밉살스런, 말씀을.”
“우연이군. 나도 네가 밉살스럽다 생각하던 참이다.”

말을 마치면서 남자는 시야가 핑 도는 것을 느꼈다. 푹 젖은 채 몸에 달라붙는 옷은 무겁고 차가웠다. 부엌 쪽을 내다보니 패거리가 옷을 말리면서 꾸벅거렸다. 방금 생긴 자잘한 상처들이 눈에 들어왔다. 약주머니와 소년의 젖은 옷을 집어든 남자는 꺼내려던 말을 도로 삼켰다. 소년은 잠들어 있었다. 남자는 이불을 여며주고 일어섰다.



12.

패거리 중 한 명이 뒤란에 묻힌 항아리에서 채소절임을 발견했다. 무리는 밥 없이 시고 짠 채소와 국물을 나눠먹었다. 낙뢰는 거짓말처럼 가라앉았지만 비는 기세만 수그러든 채 이어지고 있었다. 공기는 갈수록 차가워졌다.
정오 무렵 길을 살피러 나간 자가 돌아왔다.

“장군님, 마을을 봤습니다요. 근데 큰물이 져서 다리가 쓸렸어요.”
“마을에 가려면 물을 건너야 한다는 이야기냐? 물은 어떤가?”
“탁해서 깊은지는 모르겠고요. 물이 빠르고 넓구먼요.”

남자는 가벼운 열이 있는 이마를 짚고 잠시 생각했다. 한 사람이 눈치를 보며 나섰다.

“장군님, 허락해 주시면 제가 가서 건널만한 데를 알아보겠습니다요.”

남자는 표정 없는 얼굴로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원자가 달려 나간 후 남은 패거리들은 남자로부터 떨어진 곳에 모여 앉았다. 혹은 이를 잡고 혹은 비를 구경하고 혹은 꾸벅거렸다. 남자는 눈을 떼지 않았고 패거리는 눈길을 피했다.
두 시진 쯤 지나 비가 안개처럼 엷어졌을 때 길잡이가 돌아왔다. 온통 흙투성이가 되어 돌아온 길잡이는 물이 허리께까지 차는 길목을 발견했다고 보고했다. 남자는 집을 정리하고 출발하도록 명령했다. 해지기 전에는 물을 건너야 했다. 길잡이를 뒤따르는 걸음들이 절로 바빠졌다.
남자가 시킨 대로 말에 탄 소년은 해쓱한 낯으로 내내 생각에 잠겼다. 소년의 눈은 앞서가는 패거리들에 붙들려있었다. 갑자기 목소리가 들렸을 때 남자는 놀라지 않았다.

“어제 죽은, 쿨럭. 죽은 사람들을 생각했습니다.”
“예측했어야 했다고. 그걸 예측할 수 있었다는 것인가?”
“저보다는 대인이 산을, 쿨럭쿨럭, 크흐음. 더 잘 아시겠지요. 낙뢰는 암반을 타고 흐르기도 합니다. 하물며 빗물이 새어 젖어, 쿨럭, 젖어있는 암반임에야.”
“그렇다고 반드시 그런 곳에 벼락이 치진 않아. 그러니까 목숨은 하늘에 달린 것이다. 자네 탓에 죽은 거라니, 정말이지 건방진 소리 아닌가.”
“사람의 노력으로, 쿨럭쿨럭, 피할 수 있었다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한 사람의 힘에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이렇게까지 도와주시는 것입니까?”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점차 물소리가 가까워졌다. 나무가 적어지면서 시야가 트이기 시작했다. 너른 탁류를 앞두고 무리는 잠시 멈춰 섰다. 평소에는 얕고 넓게 흘렀을 개천이 사흘의 큰비로 넘친듯했다. 길잡이가 가리킨 방향에는 교각이었음직한 나무기둥이 나란히 서있었다. 유목 같은 게 걸리면서 부근에는 여울이 고였다. 패거리는 숲에서 적당한 작대기를 꺾어들고 교각에 약간 거리를 둔 하류로 걸어 들어갔다. 물은 거셌으며 뼛골이 시리도록 차가웠다. 명령이 없어도 무리는 말을 중심에 두고 한 덩어리가 되어 걸었다.
남자는 패거리와 마찬가지로 물에 몸을 담근 채 말에 태운 소년을 붙들었다. 차가운 물 한복판에서 소년은 눈에 띄게 안색이 나빠지고 있었다. 무릎과 등을 붙잡은 손에서 심한 떨림이 느껴졌다. 격려하려던 남자는 쭈뼛 신경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패거리가 짧게 소리쳤다. 교각에 걸려있던 거목이 여울에 떠밀려 이쪽을 향해 곧장 떠내려 오고 있었다. 피할 틈이 없었다. 거목이 무리를 덮치려는 순간 누군가가 움직였다. 길잡이였다.
길잡이는 거목의 가지를 움켜잡았다. 길잡이의 몸이 거목에 들이받혀 둥실 떠올랐다. 사람들은 얼른 길잡이를 붙들었다. 물살에 떠밀려 거목의 뿌리가 핑그르 돌았다. 손을 놓자 거목은 사람들을 지나쳐 하류로 떠내려갔다. 동료들에게 부축되면서 길잡이는 소년을 흘끔 올려다보았다. 소년의 표정을 본 길잡이는 빨개진 눈으로 환하게 웃었다.
남자는 부러진 칼날을 생각했다.

“10년 전의 조조는 지금의 우리 주공만큼이나 미미했지.”

수면이 무릎 아래로 내려가면서 무리가 흩어져 걷기 시작할 때 남자가 입을 열었다.

“주공이나 그분의 의제들이 변할 거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하지만 그 사람들도 흔들릴 때는 있겠지. 그 때문에 언젠가 반드시 올 기회를 놓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기회라고요.”
“사람의 노력에 하늘이 응답한다고도 하지.”

소년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면식을 익힌 며칠간 남자에 대해 알게 된 것들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시선을 느낀 것처럼 고개를 든 남자는 소년의 눈에서 숱한 질문을 읽어냈다. 남자는 조용히 대답했다.

“모처럼 얻은 귀한 고언을 헛되이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남자의 말에는 틀림없이 남자의 뜻대로 실현될 것 같은 힘이 실려 있었다. 쭉 그랬듯이. 남자의 주군에 대해 생각하면서 소년은 입 밖으로 마음의 한 자락을 미끄러뜨렸다.

“유황숙은 하늘이 살피는 분입니다. 대인 같은 분이 따르니까요.”

남자는 유목이 오는지 살피려는 듯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나는 평범한 사람이다. 여기 있는 무리조차 내가 아니라 자네를 따르지 않는가.”
“장군의 군율보다는, 쿨럭쿨럭, 서생의 참견이 유하잖습니까.”
“병사는 고집이 세서 일개 서생을 따르진 않는다. 너는 언제쯤 정체를 드러낼 셈이야.”

소년은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남자도 덩달아 피식 웃었다. 소년은 조금 놀랐다. 표정이 적고 단정해서 차가워보이던 남자의 얼굴은 의외로 바탕이 온화했다. 새삼 무릎과 등을 붙든 손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여태껏 긴장 탓에 깨닫지 못한 것이었다.
마지막 빗방울을 뿌리는 잿빛 구름덩이마다 조금씩 밝은 놀빛이 깃들었다. 이제 인가에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보이고 있었다.



13.

비쳐드는 햇빛에 눈이 뜨였다. 열린 문간에는 나이든 낯선 여자가 서있었다. 소년은 잠시 이곳이 어디인지 생각했다. 여자는 김이 나는 그릇을 들고 다가왔다.

“좀 더 누워있어요. 이틀을 꼬박 잔걸.”
“제 일행은….”
“바쁘다며 오늘 일찍 떠났네요. 여기서 며칠 몸조리하며 기다리라던데.”

침상에 누운 소년은 하루 종일 말이 없었다.
며칠 후 동쪽에서 사람이 찾아왔다. 방안에 들어선 사람을 보고 소년은 적잖이 놀랐다. 친형이 강동에 데려갔던 집안의 노복이었다.

“깜짝 놀랐습니다. 웬 협객들이 하구의 여관을 다 뒤지고 다니면서 소인네를 찾아다녔거든요. 도련님의 이름도 몰라 남양에서 온 서주 태생의 서생이 오의 형이 보낸 사람을 찾는다, 라고 일일이 말하더군요. 도련님이 변을 당한 얘길 들었을 땐 정말이지.”

소년의 멍한 얼굴은 복잡해 보였다. 노복은 은근한 어조로 화제를 바꿨다.

“여기까지 오셨다는 건 결정을 하신 게지요?”

소년이 눈썹을 움직였다. 소년의 눈을 본 노복은 불길한 기분을 느꼈다.

“형님께는 몸이 나빠져서 중간에 돌아갔다고 전해주겠나? 사실이기도 하고.”
“예에? 큰 도련님은 이제나저제나 둘째도련님만 기다리시는걸요? 너무 바빠서 둘째도련님이 꼭 있었으면 하세요. 그게 아니라도 두 분이 그리 오래 떨어져계셨는데.”
“형님은 나를 아신다. 도망치려면 지금 뿐이겠지.”

소년은 싱긋 웃으며 일어섰다. 노복은 울상이 되었다. 소년을 부축하면서 노복은 큰 도련님이 걱정하신다, 다친 둘째도련님을 두고 갈 수 없다 탄식을 늘어놓았다. 결국에는 노복이 직접 소년을 남양에 바래다주는 데서 타협이 이루어졌다. 그날, 소년은 떠났다.
시리도록 파랗게 개인 겨울하늘에는 흰 구름이 산봉우리를 박찬 용처럼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 모습에서 유명하지만 지금은 보잘것없는 한 사람을 연상한 소년은 그에게 기회가 주어질 가능성을 생각했다. 침상에 누운 며칠간 곱씹어온 상념은 이제 재미있을 만큼 거대해져 있었다. 자신이 그 사람에게 대군을 만들어주고 젊은 무장이 지휘하는 데까지 생각이 이르자 소년은 어디까지나 상상이지만, 하고 픽 웃어버렸다. 소년과 젊은 무장은 아직 세상에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채였다.
아직은, 삼일의 큰비를 기다려야 할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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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이걸 엔솔에 투고하려 했지만 아무래도 분량이 마음에 걸려 패스했습니다.(긁적)
그런데 보고 또 봐도 참 뻘한 팬픽이네요.;;;
Comments
삼국지동인녀★  (2010.07.10-22:44:17) 
아니에요~ 뻔하지 않은걸요??
캬~정말이지 문장이 너무 멋져요>< 정말이지 다음편이 정말 정말 기대되는 팬픽입니다><
다음 편도 어서어서 올려주세요!!>-<
국밥이  (2010.07.20-22:11:10) 
그리고 이때 이미 두사랑사이에서는 사랑이 싹트고있었따ㅠㅠㅋㅋㅋ아 두사람 다 너무 좋군요ㅠㅠㅋ
  (2010.07.26-20:26:36) 
멋집니다.. 간만에 집중하고 본 글이네요.
이데  (2010.07.31-01:42:59)  
오랜만에 보배같은 글이 올라왔네요 ㅠㅠ 멋집니다!! 엔솔 참가하셨으면 좋았을텐데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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