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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습기사]  潛龍交雲 -上- [1] 2010.07.09-23:5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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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산을 허물 기세로 비가 쏟아진다.
거대한 것이 우릉우릉 울릴 때마다 낡은 마룻바닥이 바르르 떨렸다. 어린 아이들이 기운 없이 보챘다. 퀭한 눈들은 무심했다. 쿵, 쿠웅, 둔한 파열음에 그 눈들이 흔들렸다.
소년은 반 토막만 남은 형상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닫을 수 있는 곳은 모두 닫은 탓에 시야가 컴컴했다. 다시 도끼를 쳐들었다. 습기를 머금은 나무가 퍽퍽 갈라졌다. 꼬마 하나가 슬쩍 일어나 쪼개진 나무토막을 더듬어 모았다. 곧 매캐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서로 눈치를 살피던 아이들과 어른들은 바알간 불씨를 에워싸고 바짝 달라붙었다.
문이 벌컥 열리면서 거대한 그림자가 들이닥쳤다. 움찔 얼어붙은 사람들의 얼굴이 금방 누그러졌다. 안을 휘 둘러본 남자는 고삐를 잡고 걸어 들어왔다. 말이 한바탕 몸을 털자 사방으로 물이 튀었다. 이미 푹 젖은 사람들은 피하는 시늉조차 하지 않았다.

“어떻습니까요, 나리? 건널 수 있겠습니까요?”
“물이 깊고 험하오. 다른 길을 찾아야겠소.”
“겨울에 무슨 비가….”

끝맺지 못한 말이 한숨으로 이어졌다. 사람들은 체념에 익숙한 낯으로 불을 응시했다. 남자는 문을 닫고 입구 근처에 서서 손바닥으로 말의 젖은 털을 쓸었다. 말과 자신의 몸에서 대충 물기를 털어내고 벌겋게 언 손으로 불가에 온 남자가 문득 쌓여있는 장작더미에 눈길을 주었다.

“그건 신상(神像)인가?”
“그렇습니다.”

소년이 조용히 대꾸했다. 불가에 둘러앉은 사람들은 쭈뼛거리며 남자의 눈치를 살폈다. 남자는 말없이 쭈그리고 앉아 불을 쬐었다.
계곡을 파내려가는 탁류의 굉음이 끊임없이 고막을 울리는 탓에 귀가 먹먹해졌다.



2.

“그 중에서 이 경로로 가는 것이 시간은 걸려도 가장 안전할 것입니다.”
“아유, 젊은 총각이 길에 참 밝네. 총각이 왔다는 남양은 여기서 서쪽이지?”

소년이 바닥에 숯으로 그린 지도는 자세하면서도 보기 쉬웠다. 입을 헤벌리고 듣던 사람들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조용히 대화를 듣던 남자가 끼어들었다.

“강동은 살기 좋다고 들었소만. 고향을 버리고 형주까지 오게 된 사연이라도?”
“강동이야 눈에 뵈는 땅이 죄 옥답이지요. 허지만서두 변방에선 물에나 뭍에나 사시장철 비적떼랑 오랑캐 잡놈들이 들끓는 걸 어찌 견뎌.”
“이번에 손가를 물려받은 사람은 꽤 젊다고 들었는데.”
“아주 젊은 분이라우. 여기 총각이랑 비슷하시려나?”
“손랑이 워낙 대단한 분이었는데 하늘이 너무 일찍 데려가셨수다. 때는 이때다 하고 아무 잡놈이 튀나오는 게지. 젊은 도련님을 못 믿는 건 아니지만 우리 동네 살펴줄 때까지 기다릴 재간이 없었수다. 퉤.”

누군가가 화톳불에 침을 뱉었다. 사람들은 그 말이 맞다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덜 마른 누더기 자락이 헐렁하게 건들거렸다.

“근데 총각은 강동엘 왜 가나? 칼붙이도 없이 홀몸으로 갈 데가 아니야, 지금.”

소년은 금방 대답하지 못했다. 곤란해 하는 옅은 웃음이 조금 길어지자 사정이 있으리라 지레짐작한 사람들은 말을 바꿨다.

“총각도 나리도 말씨가 설어. 강동이나 형주 사람은 아니고, 그보단 북쪽 사람들 말씨 같은데. 원래 고향이 어딘가? 나리는요?”
“서주입니다. 서주 낭야.”
“기주 상산.”
“총각도 나리도 난을 피해 예까지 오신 게로군요. 하기야 요즘 세상에 누가 고향에서 늙어 죽겠냐마는.”

반백이 된 사람 한 명이 담담하게 웃었다. 수 년 전 있었던 서주의 비극이나 근래에 전장이 된 기주의 상황을 굳이 더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었다. 아이를 안은 아낙이 붙임성 있게 웃으며 말을 걸었다.

“장군님은 하구에 가신댔죠. 무슨 임무하러 가시나 봐요?”
“사적인 일이오. 그리고 나는 떠돌이요.”
“에유, 척 보니 늠름하고 의젓한 게 딱 장군님인데요 뭘. 유경승님은 인자한 분이라던데 그게 참말인가요? 형주에선 비적이나 전쟁 걱정 없이 살 수 있다는 게 참말이겠지요?”

갑자기 불퉁한 낯의 중년 남자가 성을 내며 끼어들었다.

“이 여편네가, 헛말로 나리를 귀찮게 해. 세상에 전쟁 걱정 없는 데가 어딨어! 유황숙이 이번엔 형주에 붙었단 말야! 사단 나기 전에 적당히 벌어 허도엘 가야 한다니까.”
“이봐, 말조심해. 그래도 황숙님인데.”
“없는 데서는 나라님도 욕하는데 무얼?”

남자들 사이에서 잠시 실랑이가 벌어지자 여자들과 아이들은 불안해하며 눈치를 살폈다. 형주에 정착할 것인가, 북쪽으로 갈 것인가. 사람들은 아직 결정하지 못한 채 여기까지 이른 모양이었다. 정작 질문을 받은 남자는 가만히 사람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장작토막을 불에 집어넣으면서 소년은 남자를 곁눈질했다. 불빛이 반사된 탓인지, 남자의 표정 없이 단정한 얼굴에서 유독 안광이 형형했다.

“형주는 그 아이가 자라는 동안에는 평화로울 겁니다.”

사람들은 소년을 쳐다보았다. 소년은 멋쩍은 듯 빙그레 웃으며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3.

조금은 가늘어진 빗발이 지붕에서 조근조근 지줄댔다.
사람들은 잠들어있었다. 거적가리 한 장마다 여럿이 들어가 서로의 몸에 겹쳐 누운 모습이었다. 어린아이들은 말의 뜨거운 옆구리에 등을 대고 누웠다. 숨이 드나들 때마다 사람들의 입에서 옅은 김이 흘렀다.
그 틈에서 소년이 일어나 앉았다. 가져온 모포를 아이들에게 내준 것에 고마워한 사람들은 소년 혼자 쓰라며 거적 한 장을 줬다. 거적을 처음 써보는 것은 아니었지만 깊이 잠들 수가 없었다. 소년은 베고 누웠던 봇짐을 풀었다. 죽간 한 개를 꺼내자 단출한 봇짐이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소년은 조그맣게 줄어든 불빛에 의지해 죽간을 읽었다.

“자둬. 추운 곳에서는 쉽게 체력을 잃는다.”

소년은 고개를 들었다. 남자는 사람들의 원 바깥쪽에서 말안장을 베고 칼을 끌어안은 채 누워있었다. 이런 잠자리가 익숙한 모습이었다. 소년은 죽간을 둘둘 말아 끌어안고선 불을 바라보았다. 약간 길어진 침묵을 남자 쪽에서 깼다.

“10년은 평화로울 거라고. 왜 그렇게 생각하지?”
“정확히는 7, 8년이지만. 그동안은 조맹덕도 손가도 형주를 건드리지 못합니다.”
“반대로 형주에서 먼저 움직이는 수가 있지. 한 번 크게 패했지만 원가는 아직 건재하다. 지금이라도 북진하면 조조는 원소와 유표 사이에 끼어 모양이 아주 우스워질 텐데.”
“유경승의 뜻이 형주 바깥에 있겠습니까?”
“10년 이야기를 해봐.”
“조맹덕이 하북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 손가가 강동을 다잡는 데에 필요한 시간이 대략 그 정도라 보는 겁니다. 유황숙은 세력이 미미하고 유경승은 수성에 만족하니 배후를 걱정할 필요도 없지요. 이변이 없는 한 그들은 해낼 것입니다. 문제는 형주가 그때를 대비하고 있느냐는 것. 대인을 보낸 분께선 그게 궁금하실 것 같군요.”

묻기를 기다린듯한 대답이었다. 남자는 시선을 피하며 미간을 찡그렸다.

“나 자신이 남들만큼은 알고 싶은 것뿐이야. 강동에 가는 건 그 죽간과 관련 있나?”

소년은 애매하게 웃으며 입을 다물었다. 끌어안은 죽간을 만지작거리던 소년은 이윽고 고개를 얕게 가로저었다.

“지금 오에 있는 가형이 보낸 겁니다.”
“저쪽은 무기도 없이 혼자 여행하기가 조금 곤란한 듯한데.”
“하구에 사람을 보내준다 했습니다.”

오는 손가의 새 주인이 지금 머무는 곳이었다. 남자는 새삼 소년을 눈여겨보았다. 여행을 위해 간소하고 거칠게 차렸지만 행동거지는 틀림없는 사족(士族)의 것이었다. 사람들이 소년을 편하게 대할 수 있었던 것은 빙글빙글 웃으며 틈을 보여줬기 때문임을 남자는 깨달았다. 소년은 단지 형을 만나러 가는 것일까, 아니면 손가에 사관하려는 것일까? 남자는 눈을 감고 코로 숨을 뿜었다. 아쉬운 것도 같고, 실망한 것도 같은 표정이 언뜻 드러났다. 그 표정을 보지 못한 소년은 죽간을 향해 중얼거렸다.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이를 위해 죽습니다. 알아주는 이를 만나는 것은 그만큼 어렵습니다. 대개는 그것을 고려할 기회조차 갖지 못했겠지요.”

남자는 눈을 떴다. 잠이나 자라고 대꾸해줄 참이었지만 소년은 진지했다. 소년? 그러고 보니 여인처럼 선이 가늘고 흰 얼굴에서 눈매만은 청년의 느낌이 났다. 애매한 시기였다. 남자는 자신을 돌이켜보았다. 처음 전장에 선 것이 그 무렵이었다. 입가에 떠올린 쓴웃음이 갑자기 굳어졌다. 잠들었던 말이 고개를 들고 귀를 쫑긋거렸다. 남자는 칼자루에 손을 가져갔다. 소년은 죽간을 움켜쥔 채 무릎을 세워 일어섰다.
수를 헤아리기 어려운 무거운 발자국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남자의 손짓을 이해한 소년은 사람들을 이끄는 반백의 남자를 조용히 흔들어 깨웠다. 깬 사람들은 소리 없이 짐을 챙기면서 거적으로 불빛을 숨겼다. 남자는 칼자루를 느슨하게 쥐고 한손으로 불안해하는 말을 달랬다.
왁자지껄한 욕설과 웃음소리가 들렸다. 절그렁거리는 쇳소리도 들렸다. 점차, 말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는 거리까지 가까워졌다.

“형님, 저거 지붕 아뇨?”
“살았다! 가자, 이놈들아.”

흥겨워하는 소리들이 왈칵 들이닥쳤다. 조용해졌다. 험한 몰골에 저마다 무기를 지닌 남자들과 볼품없는 유랑민들의 눈이 마주쳤다. 양측의 움직임이 멈춘 지점에서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8척에 달하는 키와 당당한 체격이 뿜어내는 분위기는 예사 칼잡이의 것이 아니었다. 압도당한 패거리는 뒤편의 유랑민들을 잠시 잊었다. 패거리의 대장이 반걸음 나섰다. 대장은 짧은 극(戟)을 쥔 채 두 팔을 벌렸다.

“선객이 와 계셨구만. 피차 비 맞은 거지 처진데 자리 좀 나눕시다?”

남자는 반백의 남자에게 눈짓했다. 반백의 남자는 떨리는 다리로 일어섰다.

“이쪽은 힘없는 백성이오. 애들이 있소. 사람이라면 부디.”

패거리들은 남자의 등 뒤를 자세히 훑어보았다. 여자들을 보고 퀭한 눈알들이 번득였다. 남자가 칼자루를 탁 두드렸다. 패거리의 눈이 다시 남자에게 집중되었지만 압도당한 기색은 엷어져있었다. 대장은 짐짓 성내는 소리로 외쳤다.

“자자, 주둥이들 물어라! 여자와 애들이 있다잖냐! 조용히 자빠져 자라!”

패거리는 수군거리며 꾸역꾸역 들어왔다. 다섯 명. 유랑민들은 숨소리를 죽이고 구석으로 물러났다. 패거리는 불을 크게 일으키고 널찍이 드러누워 젖은 옷을 말렸다. 개중 몇 명이 말에 손을 뻗었다. 남자가 고삐를 잡아당기자 패거리는 손을 물리며 입맛을 다셨다. 산행이 고됐는지 패거리는 금방 코를 골며 잠에 빠졌다. 불빛이 닿지 않는 어둠 속에 구겨 넣듯이 웅크린 유랑민들은 하나같이 눈을 깜빡이며 패거리를 쳐다보았다.
누군가가 신상을 깨부순 응보라고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4.

“급하지 않으시다면 산을 벗어날 때까지 사람들을 봐주셨으면 합니다.”

여행을 위해 준비한 마른음식을 들고 곁에 앉은 소년이 말했다. 남자는 자신의 음식을 씹으며 불터 쪽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침을 흘리는 패거리에게 유랑민들이 쭈뼛거리며 음식을 나눠주고 있었다. 패거리는 시시덕거리며 유랑민들을 계속 흘끔거렸다.

“내가 왜?”
“그럴 생각이시면서 뭘 되물으십니까?”
“허. 단정 짓는 근거가 뭐야.”

그때 패거리가 큰 소리로 떠들기 시작했다. 대장에게 먼저 가서 보고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이 반복되었다. 패거리 중 한 명이 일어섰다. 그가 나가는 것을 유랑민들은 핏발 선 눈으로 쳐다보았다. 소년은 더욱 음성을 낮췄다.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침이 되었는데도 비는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유랑민들은 허기조차 잊고 서둘러 사당을 나섰다. 사람들은 남자와 소년이 따라오자 조금은 안심하는 눈치였다. 그 기색이 초조함과 두려움으로 바뀌었다. 패거리가 거리를 둔 채 따라붙고 있었다. 이쪽의 걸음이 빨라지자 저쪽에서도 속도를 높였다. 겁에 질린 사람들은 이제 달리고 있었다.

“대인, 이쯤에서….”

소년이 말을 꺼냄과 동시에 남자가 멈춰 섰다. 칼이 칼집에서 빠져나왔다. 칼을 비끼고 좁은 산길을 막아선 남자를 발견하자 패거리는 주춤했다. 유랑민이 아직 시야거리에 있는 것을 확인한 대장은 남자를 가리켰다.

“쳐!”

패거리는 짐승처럼 소리 질렀다. 계속 내린 비로 미끌거리고 물컹한 산길을 능숙하게 박찬다. 욕설로 아우성치는 패거리에 눈을 붙인 채 남자는 안장으로 손을 뻗었다. 소년은 엉겁결에 날아온 것을 받았다. 팔뚝 길이만한 짧은 칼이었다.

“먼저 가라. 사람들을 세워야 한다.”

남자의 등을 쳐다본 소년은 입을 꾹 다물고 유랑민들을 뒤쫓아 달렸다.
패거리의 걸음이 슬그머니 느려지기 시작했다. 신경 쓸 것이 없어진 남자로부터 뿜어지는 기백은 등 뒤에 성벽을 인 것처럼 웅장했다. 상대가 단 한 명뿐이라며 호통을 치려 해도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마침내 패거리가 멈췄다. 기묘한 침묵 속에서 남자는 좌우로 빠르게 칼을 휘둘렀다. 나무 두 그루가 신음하며 엇갈려 기울어졌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흙과 물이 튀었다. 길이 막혔다.
나무는 두께가 한 뼘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칼로 나무를 베는 이야기 같은 것은 들은 적조차 없었다. 기가 질린 패거리는 목이 졸린 소리를 내며 뒷걸음질 쳤다. 남자는 냉정한 눈으로 패거리를 내려다보며 말에 올라탔다. 단기필마가 멀어지는 것을 패거리는 그저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발자국을 따라 말을 달리는 내내 남자는 입맛이 쓴 얼굴이었다. 흐린 얼굴로 생각에 잠겨있던 남자가 표정을 바꾼 것은 갑자기 이상한 예감 같은 것이 솟구친 탓이었다. 주위를 경계한 남자는 말이 가볍게 긴장한 것을 깨달았다. 훈련받은 군마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한 가지 경우뿐이었다. 남자는 말을 재촉했다. 곧 남자의 오감에도 말이 감지한 것과 같은 것들이 포착되었다.
격한 물소리가 가까웠다. 거기에 사람의 비명 소리가 흐릿하게 묻어났다.
길바닥에 흙이 줄고 바윗돌이 늘면서 말발굽소리가 날카로워졌다. 한 굽이를 돌자 계곡이 나타났다. 말이 공중으로 뛰쳐나간 순간 남자는 한눈에 아래의 상황을 파악했다.
계곡을 내려다보는 위치에 사람들이 있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돌을 쥔 사람들이 성난 함성을 지르며 팔을 휘둘렀다. 아래쪽에는 무장한 또 다른 패거리가 있었다. 패거리는 돌팔매를 피해 주춤 물러섰다. 한 발짝만 물러서면 포효하는 탁류에 발목을 채일 판이다.
그 사이에 남자가 난입한 것이었다. 사람들의 돌팔매질이 뜸해진 순간을 놓치지 않고 패거리는 계곡을 따라 하류 쪽으로 달아났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생각하면서도 남자는 패거리의 숫자를 헤아렸다. 여섯 명. 패거리의 무장을 훑으면서 남자의 눈이 가늘어졌다.

“나리!”

고개를 드니 유랑민들이 울부짖다시피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다. 유랑민들의 곁에 선 소년의 얼굴은 사람들만큼 밝진 않았다.



5.

“곤란해.”

소년은 놀란 눈으로 남자를 쳐다보았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일을 마무리 짓자고 하려던 게 아니었나. 놈들이 다시 올 테니.”
“그건 맞습니다만….”

소년은 곤란한 듯이 웃었다. 속내를 읽힌 것이 즐겁지만은 않은 듯했다. 남자는 저만치 앞에서 유랑민들을 이끄는 반백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패거리가 더 있을지도 모른다. 마을까지는 이들과 붙어있는 게 좋아.”
“더는 없을 겁니다. 이 부근은 강하태수 황조가 관할하니까요. 전쟁 중이 아닌 한 규모가 큰 도적이 쉽게 횡행하지 못합니다.”
“그래? 그래서였군. 그 녀석들은 탈영병이야.”

소년의 표정을 본 남자는 좀 더 설명을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놈들의 무구는 제식이었다. 여러 세력이 섞인 탓에 조잡했지만.”
“탈영병이 도적으로 전락한 것입니까.”
“패잔병일수도. 전장에서는 약탈이 허락돼. 밖에서도 배운 대로 하는 것이지.”

자신도 모르게 고개가 들렸다. 말 잔등에 실려 흔들거리는 남자의 모습은 조용한 동산에 산보라도 나온 것처럼 느긋했다. 그 모습에서 약탈에 익숙한 분위기를 찾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 남자를 잘 아는 것도 아니었다. 소년은 슬그머니 눈을 돌렸다.

“어쨌든, 여기서 잡아야 합니다.”



6.

질흙에 찍힌 발자국에는 빗물이 흠뻑 고여 있었다. 남자는 도적패의 흔적이 이어지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산안개가 내린 어둠 속에서는 눈여겨볼 만한 것을 찾아낼 수 없었다. 남자가 일어서자 소년은 오른편의 짧은 능선을 가리켰다.

“저길 돌아가면 앞지를 수 있을 겁니다.”

남자는 반신반의했다. 낮이었지만 안개와 비 때문에 산세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이것저것 봐둔 게 있습니다. 대충은 맞을 겁니다.”
“대충으론 안 돼. 우리가 헤매면 그 사람들은 끝장이다.”
“뒤쫓기만 해선 도적패가 사람들을 따라잡은 후에야 도착하게 됩니다. 그쪽은 열 명이니 절대 불리합니다. 먼저 가서 길을 차단해야 합니다.”
“자네 말만 듣고 사람 목숨으로 도박하고 싶진 않은데.”
“잘 됐군요. 저도 도박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남자는 칼을 어루만지며 소년을 쳐다보았다. 소년은 피하지 않았다. 침묵이 길어졌다.
먼저 눈길을 거둔 것은 남자였다. 남자는 칼을 놓고 오른편으로 걸음을 돌렸다.
소년이 지시한 방향은 심하게 요동치는 경사와 빽빽한 어둠 때문에 길을 더듬어가기가 쉽지 않았다. 남자는 말을 끌고 있어서 더욱 불편해했다. 고삐로 입을 묶인 말은 발을 헛딛을 때마다 불안하게 몸부림쳤다. 몇 번째인가, 완력으로 말을 부축해 진정시키고 진이 빠진 두 사람은 잠시 멈춰서 쉬기로 했다. 말과 사람의 젖은 몸에서 김이 올랐다. 말목을 긁어 달래면서 남자가 말했다.

“앞지르려는 건, 생포하려는 의도도 있겠지?”
“대인은 베어버릴 생각이겠지요?”
“못할 건 없지.”
“날 때부터 도적인 사람은 없습니다.”
“지금의 행동 때문에 죽이려는 것이다.”
“죽일 필요는 없습니다. 관원에게 맡기는 걸로 충분합니다.”
“내가 하겠다고 하면 막을 수 있나?”

소년은 무릎에 얹은 주먹을 꾹 움켜쥐었다. 남자의 말이 계속되었다.

“저쪽은 열이고 이쪽은 둘이다. 둘이서 관청까지 열 명을 호송하자는 것인가? 관청에 맡겨도 결말은 같다. 도적은 효수한다.”

남자의 말투는 시종 조용했다. 거기에는 틀림없이 남자의 뜻대로 실현될 것 같은 힘이 실려 있었다. 그러나 소년의 말은 남자가 들어줘야만 실현될 수 있는 것이었다. 소년은 남자가 무서웠다. 자신에게 의지를 관철할 힘이 없다는 것은 더욱 무서웠다.

“사인(私人)이 도적을 베는 것은 백성의 위급함을 모면하기 위해서지만 한편으로는 백성이 백성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책이며 옳지 않습니다.”
“내가 관원이라는 것은 알고 있을 것이다.”
“관원이라도 자의적으로 백성을 벨 권한은 없습니다. 게다가 죽이지 않고 따르게 할 방법이 있습니다.”

목이 마른 탓에 마지막에는 목소리가 갈라지고 말았다. 소년은 자신감 없어 보이고 싶지 않아 똑바로 남자를 쳐다보았다. 어둠이 드리워진 무표정한 얼굴에서는 생각을 읽기 어려웠다. 남자는 자리를 털며 일어섰다.

“일단 들어보지.”

Comments
삼국지동인녀★  (2010.07.10-22:42:26)  
재밌어요>< 문체가 되게 수려하시고 표현력도 정말 멋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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