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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벽]  하구夏口 [2] 2010.02.19-13:2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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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구夏口




밤에 비가 내렸다. 촘촘하고 질긴 겨울비였다. 비는 오래 내려 양기름 먹인 군막을 적셨다. 비 새는 군막 안에서 유비는 좀처럼 잠들지 못하였다. 감은 눈꺼풀 너머로 빗소리는 적선이 장강을 거스르는 소리가 되었다. 달 가린 어둠을 틈타 적은 가까워지고 있었다. 물을 덮으며 까맣게 몰려드는 적선의 환영 앞에서 유비는 식은땀을 흘렸다. 적을 이기기 위해서는 적의 본진을 박살내야 할 터인데, 물에는 겨누어야 할 본진이 없었다. 본진이 없는 적은 유비의 본진을 박살내기 위해 자꾸만 강을 거슬러 올라왔다.
어쩌면 적이 떠있는 장강 전체가 적의 본진이었다. 어쩌면 황제가 머무는 허창이 적의 본진이었다. 적에게는 본진이 없거나 강 전체가 본진이거나 닿을 수 없는 곳이 본진이었다. 유비는 적의 본진을 가늠할 수 없었다. 본진을 가늠할 수 없는 적의 가벼움이 유비는 진저리가 났다. 유비가 이불을 들추고 일어나 앉았다. 식은땀으로 젖은 목덜미에 한기가 엉겨 소름이 돋았다.
군막 밖에서는 가릴 데 없는 병졸들이 비에 젖고 있었다. 번을 서는 병졸들은 가래 끓는 소리를 내며 오래도록 기침해대었다. 겨울바람이 갑주를 얼려 쿨럭이는 기침소리가 힘겨웠다. 목덜미에 돋은 소름을 쓸며 유비는 병졸들의 추위에 귀를 기울였다. 병졸들의 추위는 주림과 얽혀 그 뿌리가 깊고 아득하였다. 오랜 유랑의 설움으로 절로 자란 해묵은 추위였다. 날이 밝아 볕을 쬐어도 병졸들의 추위는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황제를 낀 적의 병졸들은 추위를 타지 않는가. 제 병졸들의 추위를 들으며 유비는 소리 죽여 역상하는 적과 적의 병졸들과 적의 군량을 떠올렸다. 팔십만이라고도 백만이라고도 하는 적의 규모는 도무지 종잡아지지 않았다.
유비는 침상에서 내려섰다. 버선발에 진창이 스미어 발바닥이 시렸다. 시린 흙바닥을 건너간 유비는 휘장 사이로 밖을 내다보았다. 본진도 규모도 명확하지 않은 적을 기다리는 병졸들의 눈가는 지쳐 있었다. 병졸들은 이따금 오래 묵은 기침을 뱉었다. 살얼음 낀 가슴이 무겁게 들썩여 병졸들은 죽어가는 짐승의 무리로 보였다. 적이 지척에 있건만 이들을 몰아 적을 박살내는 일은 실로 요원하였다. 유비는 추위 앓는 병졸들에게 시선을 박은 채 밤을 지새웠다.
밝는 날 비가 그쳤다. 비는 그쳤으되 해가 뜨지 못하였다. 볕을 쬐지 못한 진창은 서리를 밀어 올리며 얼어붙었고 언 땅 위에서 병졸들은 짓무른 손으로 병장기를 틀어쥐고 무감각해진 발을 굴렀다. 제자리걸음하는 병졸들의 몸에서 잔비늘 같은 얼음가루가 날렸다. 볕이 들지 않는 낮에 병졸들의 추위는 곡진하였다. 유비는 침상으로 돌아가 발을 주물렀다. 새끼발톱을 물들인 보라색이 선명하게 얼어 있었다.






오랜 시간을 지내온 무장들의 말은 에둘러 멀지 않았고 간결하고 투박하고 단순하여 핵심을 곧바로 찔렀다. 병서와 사서를 읽지 않는 무장들은 고사를 끌어들여 주제를 흐리거나  생각에 치우쳐 현실의 한계를 외면하거나 자만하여 저의 의견을 밀어붙이지 않았다. 유비는 휘어진 주제를 바로 펼 이유도 통하지 않아 다시 설명할 까닭도 설전으로 굴복시킬 필요도 없었다. 제갈량이 없는 유비군의 회의는 짧고 명료하였다.
적은 비 내리던 밤에도 가까워졌으나, 적의 본진을 파악하지 못하는 한 적을 박살낼 수 없었다. 수식 없는 사실 앞에서 무력한 무장들은 저의 무력함을 알아 말이 없었다. 말 없는 무장들 앞에서 유비는 길게 말하고 먼 고사를 읊어 아득하고 때로 현실에서 멀어지기도 하는 제갈량의 말이 그리웠다. 대저 말은 허황되고 요망하여 의지할 바가 아니었다. 여름으로 접어든다는 의미의 하구에서 얼고 주리는 병졸들을 보며 유비는 말의 허무함을 알았다. 허나 텅 비어 망령되기에 말은  현실의 중압을 잊게 만들었다. 유비는 말의 굴곡에 숨어 본진 없는 적의 교활함을 탄핵하고 규탄하고 싶었다. 무력한 무장들 앞에서 적의 본진을 모르는 유비는 연신 식은땀을 흘렸다.
회의를 마치자 조반이 들어왔다. 미음 한 사발과 만두 한 덩이였다. 유비가 미음 사발을 집어 들었다. 두어 가닥의 채소 줄기가 떠 있었다. 목구멍을 열고 흘러가는 국물은 뜨거웠으나 간이 옅어 기진하였다. 유비가 사발을 내려놓았다. 조운이 넘겨보고 무릎걸음으로 다가와 맛을 물었다.


 국물은 뜨거우나 간 또한 옅으니 병졸들의 체력이 걱정이다.


유비가 미음 사발을 밀어놓으며 답하였다.


 겨울이라 병졸들이 땀을 흘릴 일이 적으니 간이 옅어도 괜찮을 것입니다.

 그대의 말은 옳지 않다. 전투가 없더라도 병졸들은 언제나 땀을 흘리지 않느냐. 체력이 다하면 때를 맞아 적을 부술 수 없음이다.


밀려드는 적 앞에서 후퇴하기 급급하여 간을 챙기지 못하였으니, 병졸들의 체력이 걱정되더라도 간을 쓰지 못합니다. 설령 병졸들이 간을 먹고 체력을 유지하여도 적의 본진을 모르니 적을 부술 수 없음은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기어드는 말을 누르며 조운이 머리를 숙였다. 무장인 조운은 하나마나한 말을 하지 않았다. 관우가 말을 받았다.


 군량이 남았음이 다행일 따름입니다.


단호히 내려끊는 말에 유비는 더는 말을 않았다. 유비는 장비에게 상을 물려주고 군막을 나섰다. 조운이 뒤를 따랐으나 돌아보지 않았다. 제갈량은 오에 있었다.






촉이 가까운 하구에서 야트막하던 산맥은 높게 물결치며 솟아올라 평야가 좁아지고 강물이 세차게 흘렀다. 바위에 부딪혀 으깨지며 거품을 내뿜는 물살이 거칠었고 먼 산의 그림자는 물 위에 드리워지지 못하고 먼 곳에서 흩어졌다. 유비는 말에서 내려 물가로 다가갔다. 얼음이 낀 장강의 가장자리는 바삐 흐르는 강심과 달리 고요하였다. 얼음장 아래로 비치는 강물은 연갈색으로 투명하고 둥근 자갈들이 물속에서 이리저리 흔들렸다. 배 안에서 흔들리는 병졸들을 연상시키는 모습이었다. 유비는 밤을 따라 다가오는 적과 적의 군선을 떠올렸다. 자갈들은 물속에서 따뜻하였고 물속의 자갈이 따뜻한 만큼 적의 병졸들도 적의 배 안에서 따뜻할 터였다.


 적은 물 위에서 흔들리며 먹겠구나. 중원의 사람이 배를 탔으니 어지럽지 않은가.


조운이 유비를 보았다. 유비는 말고삐를 쥐고 강 복판을 향해 있었다. 쫓기는 동안 주리고 지쳐 어깨를 덮은 상의가 헐거워져 있었다. 조운은 유비의 말고삐를 받아 들었다. 허벅지에 낀 살을 한하던 유비의 손이 바싹 말라 죄스러웠다.


 하류의 물길은 잠잠하니 그리 어지럽지 않을 것입니다.


조운의 대답에 유비의 눈길이 와 닿았다.


 허나 나날이 올라오고 있지 않느냐.


담담한 물음이었다. 사실을 묻는 유비에게 조운은 엷게 웃었다.


 주공께서는 적의 흔들림을 걱정하십니까.

 적이 다가옴을 걱정하는 것이다.


답한 유비가 물가에 쭈그려 앉았다. 끌어안은 무릎 위에 턱을 얹고서 유비는 오래도록 강을 보았다. 짙게 깔린 구름 아래서 강심은 어둔 빛으로 저의 몸을 뒤집고 있었다. 적은 하구까지 올라올 수 없었다. 팔십만이라고도 백만이라고도 하는 적이 밀려들기에는 하구의 강은 너무나도 비좁았다. 적은 하구의 아래에서 말을 몰아 밀려들 태세였다.
적이 육지에 내려서면 겨냥할 본진이 생길 것인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부서지는 물을 보며 유비는 생각하였다. 유비의 작은 머리통 안에서 적의 규모는 상상조차 되지 않았고 상상조차 되지 않는 적의 규모 안에서 생겨날 적의 본진 또한 아득하고 허황된 환영에 불과하였다. 땅을 딛고도 본진을 드러내지 않는 적의 광막함에 유비는 또다시 식은땀을 흘렸다. 유비는 저의 팔을 힘주어 끌어당겼다. 바위에 닿은 엉덩이가 시리고 신발 안의 언 발가락이 아렸다.


 그대는 적의 본진이 보이는가.


유비가 물었다. 묻는 목소리가 낮고 작아 물소리에 묻혔다. 조운이 유비의 곁에 한쪽 무릎을 꿇어앉았다. 유비의 시선은 여전히 강심에 꽂혀 있었다. 조운은 유비와 시선을 같이 하였다. 물은 거칠게 흘렀지만 적의 거스름을 막아주지 못하였다. 조운은 대답하였다. 솔직하여 곧고 바른 목소리였다.


 보이지 않습니다.


유비가 조운을 보았고 조운은 강을 보았다.


 하면 그대는 자꾸만 다가오는 적을 맞아 어찌하려는가.

 당면한 적을 깨뜨릴 뿐입니다.


유비는 웃었고 조운이 돌아보았다. 유비는 일어나 있었다. 제 어깨를 짚은 유비의 손아귀 힘이 강해 조운은 깊이 고개를 숙였다. 표정이 보이지 않는 유비가 말하였다.


 그대는 실로 무장이다. 허나 단지 그뿐이구나.


말을 마친 유비가 그대로 돌아서서 말에 올랐다. 조운이 일어나 말에 오르는 유비를 부축하였다. 조운의 표정은 추위로 굳어 있었으나 그뿐이었다. 조운은 무장으로 무장 아닌 다른 존재일 수 없었다. 유비를 따르는 모든 무장들이 단지 무장일 따름이었다. 유비도 알고 무장들도 그를 알아 말은 상처가 되지 않았다.


 돌아가지.


묵묵히 따르는 조운을 곁눈질로 살핀 유비가 허벅지로 말의 배를 조였다. 말은 한 무더기의 콧김을 뿜으며 네 굽을 디뎠다. 등 뒤로 울리는 물소리가 쇄도하는 적의 군마 같아 유비는 고삐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계책도 책략도 필요하지 않은 무장들의 순수한 전투로 살아온 나날이었다. 부딪치고 부딪히고 으깨고 으깨지고 밀어내고 밀려나고 부수고 부서지며 막다른 곳이 하구였다. 더는 부딪힐 곳도 으깨질 곳도 밀려날 곳도 부서질 곳도 없었다. 하구는 유비의 막다른 사지이자 마지막 남은 본진이었다. 하구를 지키지 못하면 진정 끝이었다. 팔십만이라고도 백만이라고도 하는 적 앞에서 유비는 지난날과는 다른 방식을 요하였다. 보이지 않는 적의 본진을 끌어내어 한 번에 부수지 못한다면 살 가망은 없었다.
물 위에 감추어진 적의 본진을 근심하며 유비는 목덜미에 뜬 식은땀을 닦았다. 해묵은 추위가 기침이 되어 터져 나왔다. 제갈량은 오에 있었다.
Comments
샤민  (2010.02.19-14:16:38) 
아... 적벽대전 직전인가요. ㅜㅜ 이 시기의 이야기는 주로 오에서 진행되는것만 봤기때문에 색다르네요. 뭔가 전전긍긍하고 있을거라고 생각만 했었는데 이렇게 보니까 정말 잘 와닿고 재밌어요 ㅡㅜ
무향후  (2010.04.13-23:46:34)  
왠지, 칼의노래랑 비슷한 분위기네요. 제갈량의 부재를 한탄하는 유비의 모습이 드러내놓고 표현되진 않았지만..'제갈량은 오에 있었다'란 한 문장이 반복되면서 강조되는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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