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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벽]  설움의 끝  2009.12.25-16:4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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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움의 끝






잠자리에 들려 홑옷으로 갈아입으려던 차에 황호가 울음을 터트렸다. 궁녀들의 수군거림이 듣기 싫어 사람을 물리면 황호는 목을 놓아 울기 시작했다. 황호가 손바닥으로 바닥을 칠 때마다 턱 끝으로 겹겹이 밀려나온 턱살과 팔 길이보다 더 긴 허리끈 너머로 둥글게 비져나온 뱃살이 어지럽게 출렁였다. 귓바퀴에 고이는 황호의 울음은 그자의 비지땀만큼 걸쭉하고 삶은 고깃덩이 같은 누린내를 풍겼다. 그 꼴과 그 울음과 그 냄새가 역겹고 추악하고 끔찍하고 애처롭고 안타까웠다.

유선은 반쯤 벗겨진 옷깃을 여미며 웅크린 황호 앞에 쭈그려 앉았다. 황제의 기척을 느낀 황호가 바닥에 이마를 찧어댔다.



"무엇을 우느냐."

"황상, 면죽관이 무너졌으니 한의 끝이 아니겠사옵니까."

"그렇겠구나.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는 너는 참으로 충직한 신하로구나."



스치는 바람처럼 유선은 망연한 말로 황호를 어루만졌다. 위로도 빈정거림도 들어있지 않은 말은 헛것 특유의 가벼움으로 살찐 등허리를 훑었다. 찬 바닥에 이마를 처박은 황호가 다시 한 번 바닥을 치며 목을 놓았다. 주황의 촛불 아래 드러난 황호의 손은 벌겋게 부어 있었다. 유선은 모아 안은 무릎 위에 턱을 얹었다. 늙고 병든 환관의 울음은 고약한 누린내를 풍기며 질기게 이어졌다. 눈을 감으면 귓바퀴에 고인 울음이 천천히 머릿속으로 스며들었다.

면죽관을 무너뜨린 위장 등애는 마른 땅을 적시는 봄비마냥 부드럽게 성도로 스며들고 있었다. 먹잇감이 스스로 굴복하기를 기다리는 배부른 맹수와도 같이 느린 진격 앞에서 유선의 나라는 알아서 무너졌다. 아니, 선제의 나라는 알아서 무너졌다. 면죽관이 무너진 이래 아침마다 이어지는 달아난 대신과 호족과 백성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유선은 선제의 나라가 무너지고 있음이 슬펐다. 단지 그 뿐이었다. 저의 나라가 무너진다는 비통함은 없었다. 이 나라는 처음부터 끝까지, 오로지 선제의 이상과 선제의 바람과 선제의 인덕과 선제의 부재와 선제의 충신들에 얽매인 선제의 나라였다. 유선의 나라는 해내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또다시 살덩이가 바닥을 치는 둔탁한 울림이 울렸다. 눈을 뜨면 황호는 제 울음을 견디지 못하고 바닥에 이마를 찧어대고 있었다. 이마가 찢어져 투실하게 살이 찐 얼굴이 온통 피투성이였다. 유선은 혀를 찼다.



"되었다. 이제 그만하라."

"하오나 황상,"

"네 피가 튀어 황포가 더럽혀질까 걱정이다."



네 몸이 상할까 걱정이다. 너마저 없다면 누가 나를 황제로 보아주겠느냐. 유선은 속을 감도는 말을 참았다.

허울뿐인 황제라는 설움은 없었다. 제위에 오른 지 어언 40년, 설움은 상보가 살아있을 적에 이미 말라버렸다. 선제에게 여생을 바친 상보는 유선을 유선으로 보지 않았다. 상보에게 유선은 선제의 부재를 각인시키는 거짓 황제에 불과하였다. 나를 보아 주시오, 상보. 아비가 자식을 보아주지 않으면 누가 그를 사람으로 여기겠소. 나를 보아 주시오, 상보. 나를… 어린 날의 절망은 울음이 되어 흐르다 어느 순간 사라졌다. 이 나라의 정체를 알게 된 날의 일이었다. 출사표를 들이미는 상보 앞에서 유선은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꼈다. 홀가분하기까지 했다. 이 나라는 저의 소유가 아니었기에 제가 책임질 까닭이 없었다. 다만 한 사람, 저를 황제로 보아주는 이가 있어 유선은 그자를 잃고 싶지 않았다. 그자에게는 선제의 영향이 끼치지 않았기에, 유선은 그자를 마음 깊이 아꼈다. 그러나 오늘로 그자와도 마지막인 듯싶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황호의 움직임이 멎었다. 힘겹게 울음을 삼키는 내관을 버려둔 채, 유선은 궁녀들을 불러 옷을 마저 갈아입었다.



"이리 오라."



궁녀들이 빠져나간 침소에서 유선은 침대에 올라앉아 황호를 불렀다. 초를 끈 침소가 어두워 황호는 무릎걸음으로 엉금엉금 기어왔다. 어둠 너머로 옷자락을 끌며 다가오는 몸뚱이가 둔하고 크게 부풀어보여 인간이 아닌 듯 괴이하였다. 커단 몸뚱이가 가까워질수록 머릿속에 스민 누린내도 강렬해졌다. 머릿속도 나라도 모두 썩혀버리는 지독한 냄새였다. 이윽고 침대 아래 웅크린 황호는 어깨를 떨었다. 유선은 끌어안은 무릎 위에 얹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네 아직 우느냐."

"신의 몸이 늙고 병들어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황상께 추태를 보였으니 민망하옵니다."

"되었다. 이마의 상처는 어떠한고. 고개를 들어보라."



황호가 고개를 들면 어둔 가운데 검게 얼룩진 핏자국이 선명하였다. 눈물로 짓무른 작은 눈동자가 떨리고 있었다. 유선은 한쪽 발을 들어 발끝으로 황호의 이마를 눌렀다. 맨발로 미지근하고 끈적한 선지가 엉기고, 찢어진 살점의 감촉이 생경하였다. 얕은 신음이 흘러 아프냐고 물으면 황호는 아니라 답하였다. 대답하는 목소리에 물기가 서려있어 유선은 짜증을 냈다. 발끝으로 이마를 걷어차며,



"하면 어찌하여 다시 우느냐."



묻자,



"황상의 옥체가 검불처럼 가벼우시기에."



라고 답하며 황호는 입술을 깨물었다. 유선은 웃음을 터트리며 발을 내렸다. 발끝이 찬 바닥에 닿기도 전에 황호가 몸을 엎드려 두 손으로 유선의 발을 받쳐 들었다. 바닥을 치느라 부어오른 황호의 손바닥은 뜨거웠다.



"내 이리 마르도록 너를 먹였다. 그가 너와 내가 맺은 밀약이 아니더냐. 한데 너는 이제와 나의 마름을 걱정하느냐."



답은 돌아오지 않았고, 유선은 웃음을 그치지 않았다.

황호는 유선을 오롯한 황제로 보아주고, 유선은 배고픈 황호의 주림을 채워주었다. 서로의 절실한 필요에 의해 맺어진 약속은 선제의 나라를 안으로부터 갉아 먹었다. 그가 40년에 걸쳐 자신의 존재를 지워버린 선제와 선제의 충신과 선제의 나라에게 줄 수 있는 유선의 가장 큰 복수였다. 그리고 그 결실이 작금의 상황이었다.



"하기는, 나라가 망하면 나는 더 이상 너의 배를 불려주지 못하니 너와의 밀약도 끝이구나. 너는 닥쳐올 주림이 두려워 그리 울었느냐."

"한이 망하거든 황상께서도 더는 황상이 아니시니, 신 역시 황상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할 것이 두려워."

"거짓부렁은 그만 두라."



유선은 황호의 손에 잡힌 발을 빼내 그자의 어깨를 떠다밀었다. 무거운 몸뚱이가 기우뚱 일어서면 유선은 피로 얼룩진 발을 황호의 입가로 들이댔다.



"핥으라. 내 황제로서 너에게 주는 마지막 먹이다."



잠시의 머뭇거림이 있은 다음 황호는 두 손으로 받쳐 든 발끝을 입안에 넣었다. 유선의 어깨가 흠칫 뛰었다.

엉긴 피는 차갑고 탐욕스레 핥아대는 혀는 미끌거리고 맨살에 닿는 콧김은 뜨거웠다. 이를 세워가며 발을 핥는 황호를 내다보며 유선은 피울음을 울었다. 설움은 없었다. 다만 선제의 나라가 무너지고 있음이 서럽고, 무너지는 나라가 저의 나라가 아님이 서러울 뿐이었다.

그러니 남김없이 핥아먹고 미련 없이 떠나가라. 나는 네 누린내로 썩어가는 머릿속을 부여잡고 썩어가는 선제의 나라와 함께 썩어지겠다. 그것이야말로 불민하고 우둔한 자식이 저를 봐주시지 않은 두 아비를 모실 수 있는 마지막 남은 효가 아니겠느냐. 흐느끼는 유선에게 진정, 설움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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