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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벽]  갖옷皮衣 [2] 2009.11.01-14: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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갖옷皮衣






모월 모일 성이 무너져 백문루를 제외한 전 지역이 수몰된다.

지난 날, 백문루 앞에 몰려든 백성들이 외쳐댄 울음의 골자였다. 처음 열댓에 불과하던 백성의 무리는 삽시간에 수백으로 늘어났다. 개중에는 병졸의 식솔도 섞여있어 가로막는 병졸에게 그의 부모자식들이 매달려 울었다. 병졸들은 살려 달라 엉겨 붙는 피붙이를 밀쳐내지 못하고 따라 울었다. 실로 참혹한 정경이었다. 그러나 참모는 정예병을 풀어 울부짖는 백성들을 일시에 밀어냈다. 병졸에게 제 부모와 자식을 베라 명하는 참모의 표정은 추수철 농사꾼의 그것처럼 무심했다. 피난 보따리를 짊어진 백성들은 지난한 굶주림과 절망으로 검불처럼 말라 있었다. 그리고 슬플 정도로 필사적이었고 슬플 정도로 허망했다. 정예병의 창칼 앞에서 백성들은 한 무더기의 잘 마른 밀짚처럼 서걱서걱 잘도 밀려났다. 한바탕의 피울음이 지나간 자리에는 거무칙칙한 핏자국만이 선명했다.

아닌 게 아니라 흙벽돌을 쌓아 만든 성은 날마다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었다. 아무리 흙을 새로 쌓게 한들, 끝도 없이 밀려드는 물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그러니 성이 무너지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동시에 성안 사람 그 누구도 인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사실을 사실로 인정할 수 없다는 사실이 더욱 두려웠다. 두려움은 벌판을 달리는 적토보다 더 빠르게, 걷잡을 수 없는 기세로 퍼져나갔다. 피를 머금은 소문은 전보다 더 기세등등하고 음습했다. 당장이라도 밀려들 듯 넘실거리는 물이 사라지지 않는 한, 이 두려움은 끝나지 않을 터였다.



"물이 얼기 시작하면, 성이 무너질 거란 백성들의 두려움도 조금은 가라앉겠지."



장료는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망연한 허공을 지나 층계참으로 시선을 내리면, 벌써부터 두터운 갖옷을 걸친 진궁이 혼자 성벽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살집이 적어 그런지, 아니면 문관이라 그런지 진궁은 유난히 추위를 많이 탔다. 단풍이 들기도 전에 손끝이 파랗게 질리며 몸을 떨었다. 그런 그에게 갖옷을 선물하고 싶었던 주군은 아직 어린 자신을 끌고 가을 내내 사냥을 다녔다. 그깟 문관 나부랭이야 얼어 죽든 말든 상관할 바가 아니라는 고순의 말에도 수긍이 갔지만, 말을 타고 사나운 짐승을 쫓는 일은 꽤나 재미있었다. 그것이 벌써 이 년 전의 일이었다.

장료는 너덧 계단을 남겨둔 채 가쁜 숨을 몰아쉬는 진궁에게 걸어갔다. 올해도 자신이 잡은 흰 늑대의 가죽이 진궁의 목덜미와 가슴팍을 덮고 있었다. 주군이 선물한 갖옷은 목도리인 듯 옷깃인 듯 풍성하게 덧댄 흰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이 모두 검었다. 마치 주군의 갑주처럼. 그 한없이 짙은 먹빛이 장료에겐 이상하게 차가워 보였다.



"대신 얼어 죽을 거란 두려움이 생겨나겠지요."



손을 내밀면 진궁은 그런가 하고 무심히 내뱉었다. 잡아 올린 손끝이 소름 돋게 차가웠다.



"백성들은… 항상 무언가를 두려워하지. 그들의 두려움에 신경 쓰기 시작하면 군주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어. 백성이란 태평성대에도 이렇게 평화로워도 되는가를 두려워하는 존재니까."

"그럼 난세나 태평성대나 백성들에겐 모두 똑같단 말씀입니까?"

"태평성대의 백성들은 닥쳐올 미래를 두려워하고, 난세의 백성들은 닥쳐온 현재를 두려워하지. 두려움의 대상이 숨겨져 있는가 아니면 실제로 드러나 있는가의 차이일 뿐… 본질적으로는 같은 것이 아닐까."

"그건 궤변입니다."



장료는 성벽 위로 온전히 올라선 진궁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 한없이 올곧은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진궁은 성벽 너머 펼쳐진 물의 바다로 시선을 돌렸다. 날로 여위는 턱선에 닿은 늑대 털이 바람에 스치고 있었다. 장료는 제 손의 온기를 받아들여 따뜻해진 진궁의 손을 놓았다. 갑작스런 해방에 머뭇거리던 진궁은 이내 가슴팍의 늑대 털을 움켜줬다. 엷게 핏기가 돌던 손이 빠르게 식어갔다.



"나도 알고 있네."

"하지만 신경 쓸 수 없었겠지요."



억눌린 참모의 목소리를 냉담한 자신의 목소리가 추격했다. 진궁의 손이 하얗게 질렸다.



"백성들의 두려움을 신경 썼더라면 진즉에 항복했겠지요. 살려 달라 울부짖는 백성들을 그리도 무참하게 밀어낼 수는 없었겠지요."

"자네, 지금 나를 탓하는 겐가?"

"아닙니다."



그럼 그런 말을 하는 저의가 뭐야?

마주 한 진궁의 시선이 묻고 있었다. 장료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손을 들어 늑대 털에 뒤덮인 진궁의 목덜미 사이로 천천히 밀어 넣었다. 손바닥에 닿은 목줄기는 따뜻하고 빠르게 맥이 뛰고 있었다. 그러나 엄지손가락에 닿은 입술은 차갑고 거칠었다. 아마 그럴 것이었다. 굳은살이 박힌 손가락 끝은 자신이 무엇을 만지고 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무감각했다. 장료는 태어나 처음으로 붓 대신 검을 잡는 자신의 손이 원망스러웠다.



"문원…"



진궁의 뻣뻣하게 굳은 손이 장료의 손을 빼냈다. 벌어진 갖옷 사이로 드러난 목에 돋아난 소름이 뚜렷했다. 장료는 손목을 틀어 진궁의 손을 붙잡았다. 앙상하게 마른 차가운 손가락이 저를 붙든 손아귀의 뜨거움을 견디지 못하고 버르적거렸다.



"저는 지금, 당신이란 사람을 가엾다 여기고 있습니다."



조금만 힘을 줘 당겨도 진궁은 쉽게 품안으로 끌려왔다. 풍성한 갖옷에 가려진 몸이 참으로 가늘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을 텐데. 군량이 부족하다며 몇 되지도 않는 문관의 끼니를 줄여버린 탓이라 생각하며 장료는 새삼 진궁이 가엾었다. 참으로 한심하고도 가여운 사람이었다. 장료는 진궁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짐승 털 특유의 냄새가 이 비썩 마른 남자의 살내음과 뒤섞여 콧속이 간지러웠다.

문원, 지금 뭣하는 짓인가? 이거 놓게! 진궁의 날선 목소리가 아득히 먼 곳에서 울렸다. 그러게 말입니다. 왜 지금에 와서 이렇게 당신을 안고 있는 건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당신과 헤어지게 될 끝이 보이기 시작해서 이러는 것이겠지요. 저 역시 무장이라곤 하나 속내는 사람인지라 가여운 당신을 끝까지 모르는 척 덮어두기엔 마음이 약해 이러는 것이겠지요. 입속에서 웅얼거린 대답이 바람결에 흩어졌다.



"아십니까. 당신은 실로 눈물겹게 가여운 사람입니다."



자신은 언제부터 진궁을 보고 있었을까.

신경 쓰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신경 쓸 수 없는 것이었다. 첫 시작부터 불리했던 싸움. 백성들의 두려움을 신경 쓰면 앞으로 나아가긴 커녕 제자리에 머무를 수조차 없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 당신의 웃음이 사라졌다. 웃음이 사라진 뒤에는 눈물이 말랐다. 아니 눈물이 마르고 나서 웃음이 사라졌던가. 당신 스스로도 알지 못한 사이 당신은 피가 흐르는 사람이기를 버렸다. 깨닫고 보면 그저 참모로서의 당신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렸을까. 슬프게도 당신의 적은 끝없이 밀려드는 조조군만이 아니었다. 제대로 된 대책도 없이 딴지만 거는 장수들도, 싸울 의욕을 잃고 움츠러들 뿐인 주군도, 두려움에 떨기만 하는 백성들도, 양민 학살의 죄를 범한 대죄인을 벌하지 않는 하늘도 모두가 당신의 적이었다. 이는 한 인간이 맞서 싸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당신은 이 모두를 태평성대를 방해하는 적으로 간주했다.

당신은 신경 쓰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대의를 위해 소를 신경 쓸 수 없는 것이었다. 설령 그 속에 당신 자신이 끼여 있었다 하더라도.



"그러니 이제 그만합시다."



참모로서의 당신마저 산산조각 나버리기 전에. 나의 마음마저 산산조각 나버리기 전에.

진궁의 움직임이 멎었다. 콧날이 찡하더니 얼굴에 닿은 늑대 털이 눅눅하게 엉겼다. 장료는 아주 천천히 진궁을 떼어놓았다. 그리고는 진궁의 손을 잡지 않은 반대편 손으로 눈물을 훔쳤다. 시야가 정상으로 돌아오기 까지는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진궁은 장료가 눈물을 그칠 때까지 아무 말 없이 손을 잡힌 채로 서있었다. 눈물이 식자 얼굴 전체가 차가워졌다. 다시 맑아진 눈으로 바라본 진궁의 표정은 백문루 앞의 소요를 볼 때처럼 무심했다.



"문원. 미안하지만 지금 당장 부대를 이끌고 서문으로 가지 않겠나."

"네?"



뜬금없는 진궁의 말에 장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틈에 진궁은 자신의 손을 빼냈다.



"아무래도 서문에 새로 쌓은 내성의 벽이 부실한 것 같다는 보고가 올라와서, 지금 당장 문원이 가줬으면 하네."



똑바로 마주해오는 눈빛이 수상쩍어 장료는 성벽 아래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나 진궁이 장료의 양 볼을 감싸 쥐며 그를 붙들었다. 자신에게 잡혀 있던 손은 따스했고 잡혀 있지 않던 손은 차가워 소름이 돋았다.



"문원. 안 돼."



아래를 보면 안 돼.

아주 또박또박한 만류. 희게 질린 진궁의 얼굴을 바라보며 장료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달았다. 깨닫는 순간 세상의 모든 소리가 사라질 정도의 지독한 위압감이 몰려들었다. 장료는 힘이 빠지려는 무릎을 애써 다잡았다. 주군이 성벽 아래에 와 있었다. 그리고 성벽 위를, 자신과 진궁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주군의 존재를 인식하자 방심한 먹이감마냥 이제껏 느끼지 못했던 시선이 아프도록 강렬하게 느껴졌다. 끓기 직전의 물처럼 한없이 뜨겁고 한없이 고요한 눈이 자신의 목을 노리고 있었다.

덩달아 질리는 장료를 보고 진궁이 고개를 끄덕였다.



"공대님…"

"쉿. 괜찮아. 내 알아서 할 터이니, 문원은 지금 당장 반대편 층계로 내려가 서문으로 가주게. 그리고… 내가 사람을 보내기 전까진 돌아오지 말아."



무심한 말투의 중간중간이 두려움으로 떨리고 있었다. 그것이 가슴 아파 장료는 어금니를 악물었다. 진궁은 그런 장료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두 사람의 가라앉은 시선이 아주 잠깐 뒤얽혔다. 마주 보는 참모의 눈은 너덜너덜하게 닳아버렸지만 여전히 곧았다. 장료는 그 눈의 아슬함에 홀려 잠시 주군의 존재를 잊었다. 참모로서의 진궁이 아니라, 진궁으로서의 진궁이 자신을 보고 있었다. 뱃속으로 소름이 돋았다. 오오, 자신은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려왔던가. 주군마저 적으로 돌린 진궁이 자신을 봐주길 그 얼마나 기다려왔던가. 그러나 둘의 시작이 곧 끝이었다.

진궁은 장료와 이마를 맞대고 눈을 감았다. 둘의 숨결이 지척에서 섞였다. 그러나 장료는 얼굴을 붉히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볼을 거머쥔 진궁의 마른 손 위로 자신의 투박한 손을 겹쳤다. 진궁의 손은 따뜻했고 부드러웠다. 아마, 그럴 것이었다.

진궁이 결심한 듯 다시 눈을 떴다.



"신경 써주어 고맙네. 하지만 문원도 알고 있잖나. 이제 와 그만 두기에 나는 너무 늦어버렸어."



천천히 말을 마친 진궁이 아주 옅게 웃음 지었다. 겨울 햇살처럼 허망한 웃음이었다.



그러니 어서 가게나. 그대도 나처럼 늦어버리기 전에.



파랗게 언 입술이 벙긋이는 가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고 환청이었다.

장료를 놓아준 진궁은 황급히 등을 돌렸다. 목덜미의 하얀 늑대 털가죽이 햇살 속을 반짝이며 층계참으로 종종걸음 쳤다. 장료는 울컥 치미는 울음을 잇새로 삼키며 주먹을 세게 쥐었다. 진궁을 감싼 먹빛 털가죽이 성난 주군의 고함처럼 바람결에 사납게 펄럭이고 있었다.
Comments
킁킁  (2009.11.09-14:33:09) 
아 장료 진궁 ㅜ0ㅜ 이 분들도,, 좋네요,, ㅜㅜ
배수연  (2011.06.12-21:22:17)  
이것은 내가 가장 지지하는 커플링.. 지금 울음과웃음이 합쳐져 이상한 표정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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