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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벽]  정향丁香 [3] 2009.10.22-15:0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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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향丁香






문득 잠이 깼다. 번뜩 뜨인 눈에 막막한 어둠만이 넘실거렸다. 느닷없는 각성에도 의식은 수면 위로 튀어오르는 물고기의 은빛 섬광마냥 선명했다. 거칠게 숨을 내쉬면 앙금처럼 가라앉던 꿈의 잔재가 산산이 흩어졌다. 무엇에 놀라 깨었던고. 옅어지는 기억을 뒤짐질 해보아도 마땅히 짐작가는 구석이 없었다. 이미 꿈은 의식 너머로 사라진 뒤였다. 그탓인지 아니면 꿈탓인지 가슴 한 켠이 아렸다.

하릴없이 눈 뜨고 몸 뒤척이길 한 식경쯤 했을까. 가을 내 국화 더미로 숨어 울어대던 귀또리도, 단풍나무 가지에 앉아 쿨쩍이던 밤새도, 무시로 내리는 서리에 쫓기어 달아나 천지 사방이 고요했다. 밤은 깊어 어둠이 자욱한데 들리느니 곤히 잠든 여인의 숨소리였다. 버드나무 솜털인 듯 가볍게 볼을 스치는 숨결을 의식하자 진군은 얼굴이 홧홧해졌다. 뻣뻣하게 굳는 목을 돌려 얼굴을 마주하면 여인의 희고 고운 피부가 빛을 발하는 양 어둠 속에 비치었다.



"…부인."



작게 불러보아도 잠에 취한 여인은 대답이 없었다. 꿈에서 무얼 먹는지 반쯤 벌린 입술이 입맛을 다실뿐이었다. 아이마냥 천진한 그 모습이 사랑스러워 진군은 빙그레 웃었다. 부인. 다시 한 번 속삭이면 여인은 답하듯 제 서방의 품을 파고들었다. 보드레한 살이 온기를 품고 꿈틀거렸다. 한층 가까워진 여인에게선 정향꽃내가 풍겼다. 돌올하게 피어오르는 향기에 아랫도리가 다 뻐근해졌다. 여보, 부인. 열이 오른 목소리로 부르자 그제야 여인의 감겼던 눈이 사붓이 뜨였다. 둘의 시선이 얽히고 여인은 해사한 웃음을 지었다. 제 아비를 닮아 단아한 이목구비가 어여뻤다. 진군은 매화인 듯 모란인 듯 벙그러지는 입술을 마주 겹쳤다.









세필 끄트머리를 물고 있던 곽가가 기이한 소리를 내며 서안 위로 엎어졌다. 소 발굽에 짓밟힌 개구리 소리가 이럴까. 곽가의 괴상망측한 신음은 오래도록 이어졌고, 수결용 도장을 찍던 진군이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다. 서안에 한쪽 뺨을 철썩 붙이고 있던 곽가는 진군과 눈이 마주치자 삐죽 입술을 내밀었다. 당최 예의라고는 약에 쓸래도 찾을 수 없는 사내였다.



"…이거 재미없어."

"바로 앉아서 말씀하시지요."

"…너도 재미없어."

"밀린 공문 처리를 도우러 온 사람이 뭐가 재미있겠습니까."



진군의 담담한 대꾸가 지겨웠던지, 아니면 부아가 났던지 곽가는 콧김을 킁 내뿜었다. 그리고는 제 머리에 쓰고 있던 관을 벗어, 있는 힘껏 내던지는 것이었다. 의도야 분명 진군을 맞추려한 것이었겠지마는, 얇은 비단 조각에 불과한 그것은 채 절반도 가지 못해 바닥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 꼴을 본 곽가는 제 성을 못 이겨 책상을 내려쳤고, 그 서슬에 동곳이 빠져 느슨하게 묶여있던 머리채가 흘러내렸다.



"젠장! 지루하다고!"



어리고 상스럽다고 생각했다. 대체 어떻게 당신 같은 사람과 장인어른이 막역지간일 수 있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하루 이틀 일도 아니었다. 진군은 이미 습관이 되어버린 긴 한숨을 내쉬었다. 후에 상소를 올려 지적하면 되겠지. 머릿속으로 상소문 초안을 짠 진군은 새로운 죽간을 펼쳐 들었다. 욕이 분명한 몇 단어를 궁시렁대며 머리카락을 틀어 올리고 있는 사내가 미뤄둔 공문은 한두 개가 아니었다.

그로부터 한 시진이 지나도록 곽가는 조용했다. 그 잠잠함이 괴이쩍어 진군은 죽간을 훑던 눈을 들어올렸다. 아니나 다를까, 곽가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그것도 꽤나 오래 전에 사라진 듯, 바닥에 깔아둔 보료에는 앉은 흔적조차 없었다. 혹시나 싶어 바닥을 살핀 진군은 여전히 엉망으로 구겨진 관을 발견하고 다시금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 멀리 가지는 않았나 보다. 찾으러 가야할까. 깊게 내 천 자를 그리는 미간을 손가락으로 눌러 펴노라면 갑자기 짙은 탕약 내가 났다. 어디서 나는 약 냄샌가, 의아한 표정으로 코를 찡끗거리는데 등 뒤로 다가온 누군가가 어깨를 짚었다. 가랑잎마냥 가볍고 마른 손, 곽가였다.



"어디 갔었습니까?"



돌아보면,



"역시 너 재미없어. 놀라지도 않고."



하고 이죽거렸다. 비죽비죽 웃는 낯짝이 얄미웠다.



"어디 다녀왔습니까?"

"글쎄… 일전에 부탁해둔 일이 있어서 그거 알아보러."



이 시러베자식들이 한 달도 더 전에 부탁한 일을 이제야 알아냈다잖아,

라고 말하는 곽가의 과장되게 찌푸린 미간이 어이없었다. 당장이라도 해결해야할 공문이 수십 개나 밀려있거늘, 그보다 중요한 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 진군의 표정을 읽었는지, 곽가의 시선이 서안 가득 쌓인 죽간으로 옮겨갔다.



"읽어야 할 공문이 아직도 산더밉니다?"

"그래, 그래. 나도 알아. 그거 다 내가 미뤄둔 거거든."

"그렇게 잘 아시면 이만 자리에 가 앉으시지요?"



한 번 흘겨봐주고 새로운 죽간을 펼치려는데, 양 어깨를 짚고 있던 곽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가랑잎마냥 가볍고 마른 손이었지만, 손아귀의 힘만은 사내답게 우악스러웠다. 살갗을 파고드는 손가락의 생경한 느낌에 진군은 엉겁결에 튀어나온 신음을 꿀꺽 되삼켰다.

허리를 숙인 곽가가 진군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었다. 크게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적나라해 소름이 돋았다.



"근데, 장문… 사람이 그러면 안 되지."



밑도 끝도 없는 소리를 곽가는 웃음을 담아, 장난 어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약 냄새가 섞인 뜨거운 숨결이 목덜미의 여린 살에 짐승의 이빨처럼 박혔다. 맥락을 잡을 수 없는 말. 곽가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내라는 세간의 평가가 맞아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문득 진군은 아랫배가 시큰해지는 것을 느꼈다. 소나무를 휘감는 능소화 덩굴처럼 내장을 휘감고 자라나 목구멍을 틀어막는 두려움의 줄기. 곽가의 목소리는 웃고 있었으나, 그 표정은 웃고 있지 않았다. 아마 그럴 것이었다.



"나야 온 세상이 알아주는 개차반이지만, 장문은 온 세상이 알아주는 군자잖나."

"갑자기…무슨 말씀이십니까?"

"정향은 본디 문약이 즐겨 쓰는 향이지."



움찔 뛰는 진군의 어깨를 짓누르며 곽가가 낮게 목을 울렸다.



"그런데 가끔 장문에게서 그 향이 풍기더란 말이야. 그거 참 이상하지 않나?"

"별게 다 이상하십니다. 그깟 향-"

"어허, 이사람. 그깟 향이라니! 매우 이상한 일이지. 내가 알고 있기에 자넨 향을 쓰지 않거든. 옷에 향을 입히지도, 향갑을 차고 다니지도 않아. 그럼… 자네는 이 향은 어디서 묻혀온 것일까? 어째, 좀 궁금해지지 않나?"



심장이, 굴러 떨어졌다. 그때야 진군은 곽가가 무엇을 알아보러 다녀왔는지 깨달았다. 그러나 곽가의 말을 끊을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뱀에게 잡아먹힐 것을 알면서도 납작 웅크린 개구리 같이, 양 어깨를 붙들린 채 굳어 있는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곽가의 말을 기다리는 동안 진군은 애써 외면하고 있던 진실을 들여다볼 것을 강요당하는 뒤틀린 쾌감마저 느꼈다. 잊어버린 무수한 꿈들이 의식의 저변에서 튀어나올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요즘 들어 부인에게 부러 정향을 선물해준다고?"



말은 연자주의 돌올한 정향꽃내의 형태로 다가왔다. 비단 금침 위로 흐드러지던 뽀얀 몸뚱어리가 떠올라 가슴 한 켠이 아렸다. 제 아비를 닮아 단아하고 어여쁜 여인. 제 아비를 닮아 정향꽃내가 잘 어울리는 여인. 제 아비를 닮아…



"내 일전부터 문약을 대하는 자네의 행동거지가 수상쩍다 여겨오긴 했지만… 장문, 자네가 밤마다 안고 있는 상대는 부인인가, 아니면 …장인인가?"



답은 알았으나 차마 대답할 수 없었다. 진군은 밀려드는 혐오감을 주체하지 못하고 몸을 웅크렸다. 곽가는 조용히 진군의 어깨를 놓아주었다. 오래 짓눌려있던 살갗은 구멍이 뚫린 듯 무감각했고, 더럽고 더러운 욕망의 기억들이 피처럼 흘러나왔다. 마치 사막에 몰아치는 모래 폭풍처럼 거침없이 쏟아지는 꿈의 조각들에 온몸이 떨렸다.



"빌어먹을. 문약이 딸을 아끼더니 결국 군자 거죽을 덮어쓴 짐승에게 시집보내고 말았구나… 그런데도 멍청한 부녀는 아무것도 모르고 이 더러운 짐승을 여전히 남편이요 사위로 믿고 아끼니… 에이, 짐승만도 못한 상짐승 놈아. 내 하나만 일러두자. 너, 내 문약만은 안 된다. 네놈이 세상 천지 그 누굴 울리고 웃겨도 상관 않지만, 네놈 더러운 손이 내 꽃 같고 바보 같은 문약 놈에 닿는 것만은 절대 못 참는다. 알겠냐?"



시발. 세상이 난세라 이런 지랄이 생기는지, 이런 지랄이 생겨 세상이 난센지.



곽가의 씹어뱉는 욕설을 따라 진군의 몸속 어딘가 깊숙이 박혀 있던 정향꽃내가 소리 없는 오열로 솟구쳤다.

Comments
오랑캐  (2009.10.22-21:13:11) 
어이쿠. 이거 좋은데요. 진군진군. 하여튼 곽봉효님은 뭐든지 다 알고 계시는군요 ㅎㅎㅎ
  (2009.10.31-20:59:02) 
곽가, '내' 문약이라니! 만인의 연인 문약 되겠군요.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문약도 곽가도 따님도 진군도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동시에 귀엽습니다()
킁킁  (2009.11.09-14:27:41)  
진군 x 곽간 줄 알았는데 ㅋㅋ 장인과 사위라,, 신선(?)하네요 ㅋㅋㅋㅋㅋ
밤마다 아비를 닮은 부인을 품으며 장인을 생각하는 사위라 ㅡㅡㅎㅎ;
근데 저는 왠지 엇박자라 귀여운 진군 x 곽가에 꽂혔.. ㅜㅜ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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